"화면을 뚫고 나오는 배우의 에너지와 땀냄새까지는 기술이 완전히 대신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AI와 함께하는 시대를 거스를 순 없죠. 부족함은 있어도 유의미한 첫걸음이자 괜찮은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배우 소지섭이 SBS 새 드라마 '김부장' 속 인공지능(AI) 영상 도입에 대해 밝힌 소회다. 위험성이 크거나 막대한 제작비가 소요되는 장면을 컴퓨터 그래픽(CG)이나 AI로 대체하는 흐름을 수용하면서도, 인간 배우의 생생한 숨결과 에너지까지 완벽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현장의 솔직한 심경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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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방송계의 시계는 이보다 훨씬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배우의 대역이나 고난도 액션 장면의 보조 수단에 그치지 않고, AI가 아예 장편 영화의 주연 배우 자리까지 꿰차는 시대가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는 AI 배우 틸리 노우드 주연의 장편 영화 '미스얼라인드(Misaligned)' 제작 소식이 전해지며, 인간 배우를 대체하는 AI의 빠른 침투와 이에 대한 창작자들의 거센 반발이 다시금 재점화됐다. 소지섭의 연기를 일부 대체하는 기술 실험부터 가상 배우의 장편 주인공 등극까지, K-드라마와 할리우드를 막론하고 콘텐츠 산업 전반이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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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 병기' 김부장 소지섭의 과거… 3분 풀 AI 시퀀스의 탄생
드라마 '김부장'은 북한 출신 특수요원 김부장(소지섭 분)이 포섭된 뒤 북파돼 고난도 임무를 수행하는 과거 서사가 그려진다. 문제는 이 대목을 실사로 구현할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제작비와 연출 스케일이었다. 북한 건물의 대규모 폭파, 눈 덮인 도로와 터널을 오가는 치열한 차량 추격전, 차량 전복 및 난간을 뚫고 강물로 추락하는 수중 액션, 총격전 등은 막대한 특수효과(VFX)와 야외 로케이션 예산을 요구한다.
연출을 맡은 이승영 감독은 "대본상 김부장의 현재 모습 위주였고, 과거 살인 병기였다는 사실은 입으로만 전달되는 구조였다"며 "하지만 캐릭터의 최대치를 보여주려면 실제 활약상을 그려낼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정된 재화 속에서 대규모 실사 촬영을 추진할 경우 작품 전체의 중심이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그가 선택한 대안이 바로 AI 활용이다.
그 결과 한국 드라마 역사상 최초로 약 3분 분량의 주요 액션 시퀀스 전체를 '풀 AI(Full AI)' 방식으로 제작하는 실험이 이뤄졌다. 단편적인 초 단위 컷을 넘어서 스토리라인을 관통하는 하나의 시퀀스를 AI로 완결해낸 것이다. 특히 인물의 얼굴 표정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AI 영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소지섭을 비롯한 주요 출연진의 클로즈업 컷까지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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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은 처음 AI 제작 시도할 때만 해도 현장의 우려가 컸다고 털어놨다. 불과 제작 6개월 전만 해도 원하는 퀄리티를 장담할 수 없는 기술적 여건이었으나, 매주 신기술이 업데이트되는 상황 속에서 AI 팀과 연출진이 긴밀히 협력하며 완성도를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서사의 몰입을 해치지 않도록 해당 기술은 김부장의 과거 회상 시퀀스에만 한정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 제작비 60% 이상 절감… '제작비 인플레이션'의 현실적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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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가에서 AI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배경에는 회당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제작비 인플레이션 문제가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6 콘텐츠 산업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K-콘텐츠 시장에서 AI 기술 적용은 이미 임계점을 지나 실질적인 제작 솔루션으로 자리 잡았다. 급등한 출연료와 인건비, 미술 및 VFX 비용 부담 속에서 기술을 결합해 제작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흐름이 보편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SBS 드라마 제작을 총괄하는 스튜디오S의 홍성창 대표는 최근 열린 'SBS 드라마 미디어데이: 넥스트 에피소드'에서 AI 기술을 활용한 제작비 절감 성과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했다. 홍 대표는 "앞서 '모범택시3'의 절벽 및 트럭 폭파신에 AI를 적용한 데 이어, '김부장'에서는 긴 분량의 시퀀스를 AI로 구축해 해당 장면 제작비를 60% 이상 절감했다"며 "이 같은 제작 노하우의 축적이 향후 K-드라마의 강력한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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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성과의 이면에는 국내 AI 영상 제작 기술의 가파른 성장이 자리한다. '김부장'의 풀 AI 시퀀스를 담당한 모피어스 스튜디오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 VFX 전문가가 모여 설립한 기술기업으로, 자체 개발한 AI 제작 플랫폼 '에이크론(AICRON)'을 기반으로 작업을 수행했다.
에이크론은 노드 시스템을 바탕으로 프롬프트 입력부터 이미지·영상 생성, 편집 및 사운드 수록까지 하나의 워크플로에서 구현하는 통합 파이프라인을 제공한다. 상용화된 150개 이상의 AI 모델 중 최적의 솔루션을 선택·조합할 수 있어, 제작진이 구상한 연출 의도를 오차 없이 시각화하는 데 기여한다. 모피어스 스튜디오 측은 이번 작업이 단순한 VFX 대체 수준을 넘어 스토리 완성도를 보완하는 창작 파트너로서 AI의 가능성을 입증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AI와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은 단편적인 드라마 장면에 그치지 않고 콘텐츠 산업 생태계 전반으로 가속화하는 추세다. CJ ENM 등 주요 미디어 기업은 기획, 제작, 마케팅에 이르는 전 과정에 AI 및 버추얼 프로덕션(VP) 인프라를 이식하고 있다.
실내 스튜디오에서 배우의 연기를 촬영한 뒤 배경과 시각효과 전체를 AI로 처리한 하이브리드 장편영화 '아파트'나, 국내 최초로 100% AI로 제작된 장편영화 '아이엠 포포'의 등장 역시 이 같은 변화를 보여준다. 기존 크로마키 방식을 대체해 대형 LED 스크린으로 가상 배경을 입체적으로 구현하는 버추얼 프로덕션에 AI를 결합함으로써, 로케이션 이동이나 세트 제작에 드는 비효율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비즈니스 모델 측면에서도 기술 혁신이 눈에 띈다. 촬영이 완전히 종료된 후 AI 기술을 활용해 영상 내에 자연스럽게 브랜드와 제품을 입히는 '가상 PPL(VPPL, Virtual Product Placement)' 기술이 대표적이다. 간접광고 배치의 제약을 넘어서고 제작 후 단계에서도 상업적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어 새로운 수익 창출원으로 이목을 끈다.

◇ 기술 급진성에 따른 윤리적 반발… 가이드라인 및 제도 정비 시급
그러나 AI의 진화가 고도화할수록 현장의 생계 위협과 윤리적 반발 역시 불거진다. 한국창업분석연구소가 발표한 'AI 기반 영상 콘텐츠 디에이징 기술 동향' 리포트에 따르면, 할리우드가 프레임 단위의 초고해상도 렌더링에 수백억원을 투입하는 방식이라면, 국내 업계는 AI 알고리즘을 활용해 표정 변화와 조명 음영을 자동 재현함으로써 비용과 작업 시간을 70% 이상 단축하는 실용적 상용화에 집중하고 있다.
기술의 효율성은 입증됐지만,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를 중심으로 진행 중인 가이드라인 논의에서는 AI 제작 과정에서의 배우 초상권 보호, 데이터 학습 권리, 그리고 배우의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현하는 '디지털 복제본(Digital Twin)' 활용 시 계약 기준 및 수익 배분 문제가 최대 관심사로 지목된다.
배우의 연기 톤과 페르소나가 AI 데이터로 무단 학습될 때 발생하는 권리 침해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 그리고 제작비 절감이라는 명분 뒤에 숨은 스태프 및 연기자의 입지 축소 문제를 어떻게 완화할 것인지에 대한 제도적 합의점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결국 AI는 연출자의 갈증을 해소하고 제작비 장벽을 낮춰주는 유용한 도구인 동시에, 창작의 주체성과 인간 배우의 가치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