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달러 환율이 40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고 일본 국채 가격이 급락하며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공포가 재연되고 있다. 월가에선 글로벌 증시 폭락의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채권시장에서 장기 금리 지표인 10년 만기 국채 신규 발행 금리가 지난 3일 장중 한때 연 2.82%까지 상승(국채 가격은 하락)했다. 이는 1996년 10월 이후 약 30년 만의 최고치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의 확장 재정이 재정 건전성 우려로 이어지며 국채 매도세가 확대됐다”고 했다. 해외에서 일본 국채 저가 매수세가 유입되면 엔화 가치가 강세로 전환할 수 있다.
엔·달러 환율은 지난달 30일 장중 162.41엔까지 치솟았다. 환율이 162엔대를 기록한 것은 플라자합의 직후인 1986년 12월 이후 39년7개월 만이다. 엔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대규모 시장 개입에 나서거나 일본은행의 추가 금리 인상이 뒤따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엔화 가치가 급반등하면 캐리 투자자는 위험 자산을 매도하고 엔화를 매수해야 한다. 미국과의 금리 차를 이유로 빌린 엔화를 상환하지 않으면 환차손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는 주식, 채권 등 글로벌 자산 전반에 동시 매도 흐름을 유발할 수 있다.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를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엔화 가치 하락 베팅 규모는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서 지난달 23일 18만7856계약으로 사상 최대치를 나타냈다.
엔 캐리 자금 '사상 최대'…日 급격한 금리인상 땐 글로벌 증시 쇼크
'엔저 베팅' 계약 18만개로 최대…"엔 캐리 청산 땐 美 기술주 뚝"
2024년 8월 5일 일본 닛케이225지수가 하루 만에 12.4% 급락했다. 같은 날 한국 코스피지수도 8.8% 하락하며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하루 낙폭을 기록했다. 미국 나스닥지수 역시 장중 한때 6% 이상 내렸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공포가 글로벌 증시를 뒤흔든 ‘블랙 먼데이’였다. 월가는 최근 당시와 비슷한 구조적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며 일본 경제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엔저 베팅' 계약 18만개로 최대…"엔 캐리 청산 땐 美 기술주 뚝"
◇ 엔 캐리 트레이드가 뭐길래
캐리 트레이드는 낮은 금리의 통화로 자금을 조달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는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이다. 오랜 기간 이어진 초저금리로 일본 엔화는 캐리 트레이드 대상으로 자리매김해왔다.글로벌 자산운용사부터 사모펀드까지 다양하게 이뤄지는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를 집계할 직접적인 수단은 없다. 다만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서 이뤄지는 엔화 선물에 대한 약세 베팅 물량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의 기준금리 격차가 벌어질수록 엔 캐리 트레이드는 증가하고, 엔화 선물 매도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CME에서 엔화 쇼트 포지션은 지난달 23일 기준 18만7856계약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1년 전보다 여섯 배 이상 급증했다. 블랙 먼데이 직전인 2024년 7월 30일(9만8058계약)과 비교해도 두 배가량 많다.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도 그만큼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누적된 엔 캐리 트레이드는 특정 요인에 의해 빠르게 청산될 수 있다. 일본 기준금리가 오르거나 엔화 가치가 상승하는 것이다. 엔화의 ‘돈값’이 올라가면 캐리 트레이드의 기대 수익이 줄어들거나 손실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40년 만의 최저치인 엔화 가치는 역설적으로 반등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엔저 현상은 달러로 가격이 책정된 에너지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일본 경제에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할 것”이라며 “지난달 연 1%까지 금리를 올린 일본은행이 금리를 더 인상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3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것도 위험 신호다. 국채 금리 상승에 따른 상환 부담 증가는 일본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을 미루는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재정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면서 낮은 기준금리에도 국채 금리는 상승하고 있다. 일본은행으로서는 기준금리 인상을 주저할 요인이 줄었다.
◇ 日 정부 “저금리 유지”
엔화 약세를 반전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개입도 엔 캐리 트레이드에는 악재다. 가타야마 사쓰키 일본 재무상은 지난달 30일 엔·달러 환율이 162엔대를 넘어서자 “필요할 경우 언제든 적절하게 대응하겠다. 단호한 조치도 포함된다”며 시장 개입 의사를 밝혔다. WSJ는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현실화하면 관련 자금이 집중된 미국 기술주의 급락을 부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다.다만 우려가 지나치다는 시각도 많다. 우선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추가 인상하더라도 미국과의 격차가 좁혀질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 그 이유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금리 인하세에 들어선 2024년과 달리 올해는 2~3차례 기준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있다. 일본 기준금리가 올라도 2.75%포인트에 달하는 미국과의 격차가 유지되면 엔 캐리 트레이드를 청산할 유인이 적다.
일본 정부가 추가 금리 인상을 반대하는 점도 가까운 시일 내에 엔화 강세를 예상하기 힘든 이유다. 경기 회복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는 재정 확대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기준금리 동결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지난달 30일에도 일본은행을 향해 ‘경제와 물가, 금융 상황에 맞는 적절한 금융 정책 운용’을 요구했다.
시장이 2년 전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을 경험해본 만큼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마켓워치는 “청산 요인이 발생하더라도 이전과 같은 급격한 포지션 정리가 나타날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했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