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 대표되는 인공지능(AI)발 반도체 호황에 코스피 지수가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청년들의 표정은 밝지 않다. 철강과 건설, 석유화학 등 반도체를 제외한 한국의 주력산업이 부진에 빠진 탓에 일자리를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면서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 5월 제조업 취업자는 429만5000명으로 전체 취업자(2912만 명)의 14.7%로 집계됐다. 5월 기준 제조업 일자리 비중이 15%를 밑돈 건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13년 이후 처음이다. 2016년 451만4000명이던 제조업 일자리는 2020년 437만7000명으로 줄어든 뒤 올 들어서는 430만 명 아래로 떨어졌다. 저출산·고령화로 생산가능 인구가 감소한 점도 이유지만 기업들이 공정 자동화와 해외 생산을 늘리면서 일자리 자체가 줄어든 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수억원대 성과급으로 사회적 논란까지 촉발시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반도체 업종 취업자가 전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에 그친다. 좋은 제조업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다는 얘기다.
○4대 그룹 고용 줄었지만 쿠팡은 8250명 늘려
특히 한국 제조업의 핵심인 삼성그룹과 SK그룹, 현대자동차그룹, LG그룹 등 4대 그룹의 고용 인원은 일년 새 1만2375명 줄어들었다. 기업분석전문 한국CXO연구소가 자산 5조원 이상의 102개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집단)의 2024년 말 대비 2025년 말 기준 고용 인력 변동을 조사한 결과다. 4대 그룹의 고용 인원(약 73만4000명)이 102개 대기업 집단의 고용 인원(약 192만 명)의 40%(38.2%)에 가까운 점을 감안할 때 제조업 일자리 위축이 예사롭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조업 중심의 대기업 고용은 줄었지만 플랫폼 기업으로 재계 순위 22위(자산 27.2조원)로 성장한 쿠팡만은 고용을 늘리고 있다. 전국에서 물류센터를 운영하는 쿠팡풀필먼트서비스가 작년 5517명을 신규 고용해 전체 기업 가운데 고용 증가 1위였고 본사인 쿠팡(1211명)과 최종 배송 업무를 하는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1161명)도 고용이 늘었다. 쿠팡그룹 전체로는 일년 새 8250명이 늘어나 전체 고용인원이 10만8131명에 달했다. 쿠팡은 그룹별 전체 고용 인원에서도 삼성(28만3830명), 현대차(20만1540명), LG(14만4089명)에 이은 4위로 SK하이닉스를 앞세워 최근 성장세가 가파른 재계 2위인 SK그룹(10만4602명)을 제쳤다.
로켓배송이 가능한 이른바 ‘쿠세권(쿠팡+역세권)’을 확장하고 있는 쿠팡은 물류센터를 중심으로 고용을 늘리고 있다. 쿠팡은 2024년부터 올해까지 3조원을 투입해 지방에 9개 이상의 물류센터를 건립하고 있다. 2024년 11월 충북 진천 물류센터(투자 200억원·채용 400명)를 시작으로 2025년 1월 전남 장성 물류센터(150억원·450명)를 문 연데 이어 같은 해 2월 경남 김해 풀필먼트센터(1930억원·1450명)와 9월 대구 스마트물류센터(618억원·800명) 등 지방 채용을 늘렸다. 로켓배송 지역이 늘어나면서 쿠팡이 간접 고용하는 위탁배송기사(퀵플레서)도 2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단순 물류 집배송 인력만 늘어난 것도 아니다. 쿠팡이 물류 현장에 AI 기반 자동화와 로봇을 도입하면서 기술 인재 채용도 늘어났다. 자동화 설비와 로봇을 운영하고 유지·보수하는 쿠팡풀필먼트서비스 오토메이션 직군 인력은 2024년 초 330명에서 작년 9월엔 750명으로 두 배 넘게 증가했다.
물론 쿠팡의 일자리가 근속연수가 길고 임금과 복지 수준도 높은 편인 제조업보다 좋은 일자리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제조업 중심 대기업이 과거처럼 수백~수천 명을 뽑는 공채를 통해 일자리를 늘리는 방식은 한계에 직면했다고 산업계는 보고 있다. 글로벌 테크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메타(옛 페이스북)는 지난 5월 전체 직원의 약 10%인 8000명을 해고했고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도 올해 1월 사무직 1만6000명을 해고했다. 피지컬 AI 등 자동화 기술을 투입한 제조업도 공장 인력을 줄이는 추세다. AI가 오히려 일자리를 빼앗는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꺼낸 기본소득 도입이 화두로 떠오른 것도 이런 이유다. 그렇다고 당장 반도체발 초과 세수를 기본소득이나 국민 배당 등으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시점에서 쿠팡과 같은 플랫폼 기업이 만드는 일자리를 징검다리로 활용할 수 있다. 전통 제조업에 비해 유연한 쿠팡형 일자리를 무조건 저급한 일자리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과징금 짓눌려 ‘고용 확대’ 빨간불
하지만 쿠팡이 올해도 채용을 늘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쿠팡은 작년 11월 고객 3755만 명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에 따른 소비자 보상금 지급 여파로 올해 1분기(1~3월) 영업손실만 3545억원에 달한다. 지난 6월엔 개인정보보호위원회로부터 6246억원에 이르는 역대 최대 과징금까지 부과받았다. 앞서 고객 2300만 명 개인정보 유출로 SK텔레콤이 부과받은 과징금 1347억원보다도 4.6배 많다. 해외로 사례를 넓혀도 5억330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메타에 대한 유럽 당국의 과징금(3800억원)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많다.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하면 직전 3개년 평균 매출액의 최대 3%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 개인정보호법상 과징금 산정 방식에 따른 것이지만 유출에 따른 피해 정도나 후속 조치 등을 감안하지 않은 채 기업 매출만 놓고 과징금을 매기는 게 합리적이냐는 지적도 적지 않다. 매출이 상대적으로 큰 대기업일수록 사안의 심각성 여부에 관계없이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부과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오는 9월부터 과징금 상한이 매출의 10%까지 확대되는 만큼 쿠팡과 같은 플랫폼 기업의 과징금 부담은 한층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쿠팡은 이번 과징금을 올 2분기(4~6월) 실적에 선반영하고 향후 행정소송을 통해 사실관계를 규명한다는 방침이다. 과징금 여파로 쿠팡은 올해 대규모 적자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개보위 과징금(6246억원)은 쿠팡의 모회사인 쿠팡Inc의 작년 영업이익(6790억원)과 맞먹는다. 그동안 쿠팡Inc의 분기 영업이익 흑자 규모는 1500억~2000억원 수준이었다.
막대한 과징금이 향후 쿠팡의 투자 확대에는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쿠팡은 내년까지 부산 풀필먼트센터(채용 3000여 명)와 충북 제천 물류센터(500여 명), 경북 김천첨단물류센터(500여 명) 건립 등 물류망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이들 투자가 늦어지면 새벽배송 등 로켓배송 수요가 늘고 있는 지방 고객들의 불편도 커질 수밖에 없다. 산업계 관계자는 “연간 적자가 예상되는 쿠팡이 기존 계획대로 물류센터 확장을 추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쿠팡의 사업이 위축되면 로켓배송 물류망 차질은 물론 지방 지역 일자리 감소와 중·소상공인들의 판로 개척도 어려워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과징금이 과도하다며 “개인정보 유출 사고에 따른 2차 피해가 없었다”는 쿠팡의 주장을 수용하자는 게 아니다. AI발 ‘고용 없는 성장’ 시대를 맞아 제조업 고용이 줄어드는 여건에서 오히려 일자리를 늘리고 있는 쿠팡에 대한 과징금 철퇴가 유일한 해법인가를 고민해볼 측면이 있다. 실용주의를 표방한 이재명 정부라서 더욱 그렇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