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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싸게 누리는 사치[안재광의 천만의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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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싸게 누리는 사치[안재광의 천만의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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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여름 일본 도쿄로 출장을 갔습니다. 지하철을 탔는데 두 가지에 놀랐습니다. 하나는 요금. 한 번 타는 데 200엔이 넘었습니다. 우리 돈 2000원에 가까웠습니다. 요즘 ‘일본은 싸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한국보다 교통비는 비싸더군요. 또 하나는 환승. 지하철에서 내려 신칸센으로 갈아타려는데 회사가 다르다는 이유로 개찰구를 한 번 나갔다가 표를 새로 끊어 다시 들어가야 했습니다. 역 안에서 한참을 헤맸습니다. 비싼 데다 불편했습니다. 서울로 돌아와 늘 하던 대로 교통카드를 찍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그제야 평소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을, 세계에서 가장 싼값에 타고 있었습니다.
    ◆원가의 절반만 내고 타는 지하철

    서울 지하철 요금은 세계 주요 도시 가운데 가장 저렴한 축에 듭니다. 기본요금은 1550원입니다. 파리는 2.5유로로 4000원쯤 됩니다. 뉴욕은 한 번 탈 때 2.9달러, 약 4500원입니다. 런던은 더 비쌉니다. 도심 구간을 오이스터카드로 타도 2.8파운드, 5500원을 넘깁니다. 서울의 3.5배입니다.


    우리보다 소득이 낮은 나라의 도시와 비교해도 저렴합니다.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는 기본요금이 3위안, 우리 돈 700원 안팎이지만 거리에 따라 요금이 붙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의 3분의 1 수준인 나라의 도시와 견줘도 서울의 요금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가격만 싼 것도 아닙니다. 깨끗한 시설, 촘촘한 노선, 분 단위로 들어맞는 정시성, 스크린도어 같은 안전 설비, 다국어 안내와 무료 와이파이까지. 품질로 따지면 세계 최상위권입니다. SNS에는 외국인이 서울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치켜세우는 영상이 즐비합니다.

    이렇게 고품질의 ‘서비스’가 싼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가보다 한참 낮은 값에 팔기 때문입니다. 서울 지하철에서 승객 한 명을 실어 나르는 원가는 1817원입니다. 기본요금은 1550원이니 정상 요금만 받아도 원가에 못 미칩니다. 게다가 승객 상당수는 어르신들의 무임승차고 나머지도 환승·정기권 할인을 받습니다. 이것까지 다 반영하면 승객 한 명이 실제로 낸 돈은 평균 1036원에 그칩니다. 한 명을 태울 때마다 781원씩 손해를 보는 셈입니다. 원가를 회수하는 비율은 57%. 원가를 다 메우려면 기본요금이 2500원은 돼야 합니다. 우리는 그 절반 남짓한 값만 내고 타고 있습니다.


    싼 것은 지하철만이 아닙니다. 3년 전 가족과 일본 규슈를 일주일간 렌터카로 돌았습니다. 차 빌리는 데 50만원쯤 들었습니다. 하이브리드 차여서 주유는 일주일간 한 번이면 충분했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가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찍힌 고속도로 통행료가 50만원이 넘었습니다. 렌터카 비용과 맞먹는 액수였습니다. 우리 하이패스 요금이 얼마나 싼지 그제야 실감했습니다.

    ◆싼값에는 비용이 따른다

    싸게 누리는 만큼 그 차액을 누군가는 메우고 있을 겁니다. 바로 서울 시민들이 내는 세금입니다.

    올해 들어 혜택은 더 커졌습니다. 정부는 ‘K패스’를 ‘모두의 카드’로 확대했습니다. 한 달 교통비가 일정 금액(일반 6만2000원, 청년·고령자 5만5000원, 저소득층 4만5000원)을 넘으면 초과분을 100% 돌려줍니다. 서울시의 ‘기후동행카드’는 6만원대 정액권 하나로 지하철, 버스, 따릉이까지 무제한으로 묶었습니다. 올봄에는 지원이 더 늘었습니다. 이란 전쟁으로 유가가 크게 오르자 서울시는 약 1조4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짰습니다. 이 가운데 기후동행카드 이용자에게 4월부터 6월까지 매달 3만원씩 돌려줬습니다. 가뜩이나 저렴한데 여기에 또 ‘반값 혜택’을 준 겁니다. K패스도 4~9월 6개월간 가격을 절반으로 할인했습니다. 지하철, 버스 운영기관에 들어간 지원금만 2000억원이 넘습니다. 서울 시민들에겐 더없이 좋은 제도입니다. 하지만 공짜는 당연히 아닙니다. 누군가 원가와 요금의 차이를 채워 넣어야 운영됩니다.

    부담은 고스란히 세금으로 돌아옵니다. 서울 지하철 운영사인 서울교통공사의 지난해 당기순손실은 8268억원, 누적 적자는 20조원에 육박합니다. 부채만 7조7000억원이 넘어 하루 이자가 3억원입니다. 적자의 가장 큰 원인은 무임승차입니다. 65세 이상 노인과 장애인·유공자를 합치면 승객 6명 중 1명이 요금을 내지 않습니다. 지난해 무임수송 손실만 4488억원, 전체 적자의 54%를 차지했습니다.

    추가로 따져볼 대목은 형평성입니다. 무임승차는 1984년 노인복지법에 따라 국가가 결정한 복지입니다. 그런데 같은 노선을 달려도 코레일 구간의 무임 손실은 정부가 대부분을 메워주는 반면, 서울교통공사는 거의 전액을 떠안습니다. 정부가 정한 복지 혜택에 따른 재정 부담을 서울시가 훨씬 더 크게 받는 셈입니다. 서울이 분담을 더 많이 지는 건 역설적으로 서울 ‘곳간’이 넉넉하기 때문이겠죠.

    ◆이동은 기본권, 그러나 공짜는 아니다

    쌓이는 적자 탓에 서울시도 손질에 나섰습니다. 서울시의회는 최근 지하철 무임승차 연령을 65세에서 70세로 올리는 조례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대신 그동안 혜택이 없던 버스를 70세 이상 어르신에게 월 14회까지 공짜로 태워주기로 했습니다. 지하철 무임승차를 줄여 아낀 돈으로 버스 탑승 복지를 새로 주는 맞교환입니다.


    지하철에 쏠려 있던 교통 복지를 버스로 넓힌 데는 근거가 있습니다. 어르신 교통카드 이용을 보면 버스 이용 비율은 65~69세 12.8%에서 75~79세 21.3%로 높아지고 90세 이상에선 37.8%에 이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지하철보다 병원·장보기 같은 단거리 버스 이동이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정작 버스가 더 필요한 고령층이 그동안 버스 혜택에선 빠져 있던 셈입니다.

    대중교통에 세금을 쏟는 데는 여야가 따로 없습니다. 기후동행카드는 국민의힘의 오세훈 서울시장 작품이고 비슷한 교통비 지원은 경기도 등 더불어민주당이 이끄는 지자체도 앞다퉈 내놓습니다. 6·3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단체장들은 한술 더 떠 추가 혜택을 약속했습니다. 이동권을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권으로 보는 시각이 진영을 넘어 자리 잡은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이동권은 기본권이란 인식 탓에 곳간 생각을 아예 안 해선 곤란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곳간이 두둑합니다. AI 시대를 맞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이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인세가 쏟아지고 직원들의 두툼한 성과급은 소득세로, 늘어난 배당은 배당소득세로, 증시 활황은 거래세로 이어집니다. 세수가 넉넉하니 베푸는 일도 지금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호황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여러 번 겪었습니다. 곳간이 빌 때도 지금처럼 베풀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싸게, 가장 좋은 대중교통을 누리는 건 분명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누구도 이 혜택을 줄이자고 선뜻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싼값에는 반드시 비용이 따릅니다. 그 비용을 지금은 세수가,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적자를 떠안는 공기업이 메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1550원에 누리는 그 편리함의 진짜 값이 얼마인지 한 번쯤은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짜처럼 느껴지는 것일수록 누가 그 값을 치르고 있는지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재광 한국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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