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글로벌 미술계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추상화가들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 흐름 속에서 국제 미술계가 일본의 여성 추상화가를 발견했다. 어느덧 아흔 살의 마쓰모토 요코다. 일본 현대 추상회화 거장 마쓰모토가 화이트큐브 서울에서 개인전 <자연의 시선에 놓이다>를 열었다. 그는 “내 머릿속엔 아무것도 없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물감이 나를 움직이게 할 뿐”이라고 했다.
전시에 즈음해 서울 강남구 화이트큐브 서울에서 만난 마쓰모토는 작업의 출발점으로 1967년 미국 뉴욕 방문을 꼽았다. 당시 그는 잭슨 폴록과 헬렌 프랑켄탈러 등 미국 추상회화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며 강한 충격을 받았다. “차원이 다른 파괴력과 공간감에 경이로움을 느꼈어요. 그 감동을 어떻게든 제 작업 안으로 가져오고 싶었습니다.”
도쿄예술대학에서 유화를 공부했지만 그는 오랫동안 서양 회화 재료에 거리감을 느꼈다고 한다. ‘물의 나라’ 일본의 국민으로서 수묵화와 동양화의 정서가 몸에 깊게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뉴욕에서 수성 재료인 아크릴 물감을 접하며 전환점을 맞았다. 아크릴을 만졌을 때 비로소 해방감을 느꼈다는 그는 1970년대부터 서구 추상회화의 색채 감각과 동양 수묵화의 공간감을 결합한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했다. 여러 겹의 색을 화면 위에 스며들 듯 쌓아 올려 안개가 낀 풍경 같은 깊이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훗날 그의 대표적인 화풍으로 자리 잡았다.
전시에는 1970년대 후반 시작된 대표작 ‘핑크’ 연작의 초기작부터 절제된 색채의 ‘화이트’ 연작 등 40여년에 걸친 작업이 소개된다. 서정적인 화면 뒤에는 혹독한 노동이 숨어 있었다. “아크릴 물감은 금방 마르기 때문에 밥 먹을 시간도 없었어요. 왼손에는 주먹밥을 들고 오른손에는 붓을 쥔 채 작업했지요.”
그는 대형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 놓고 그 안으로 들어가 몸 전체를 움직이며 그림을 그렸다. 작업 과정에 대해 ‘캔버스의 명령에 따르는 스포츠이자 격렬한 퍼포먼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열 점을 그려도 만족할 만한 작품은 한 점 남짓. 아홉 점을 버려야 하는 일이 반복됐다.
전시의 또 다른 축은 비교적 최근 유화로 완성한 ‘블루’ 연작이다. 30여 년간 바닥 작업을 이어오며 다리와 허리에 무리가 오자 그는 한때 붓을 내려놓을까 고민했다. 대신 캔버스를 벽에 세우고 다시 유화를 그려보기로 했다. 기존의 검정 물감 대신 울트라마린과 가루 목탄 등을 직접 배합해 먹처럼 깊고 부드러운 검은색을 만들어냈다. 유화 특유의 번들거림을 덜어내면서도 동양적 호흡을 담아낸 새로운 실험이었다.
마쓰모토는 남성 중심의 일본 미술계에서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왔다. 하지만 관객에게 여성 작가로서 어떤 의미를 담아 자신의 작품을 봐달라고 하지 않았다. “제 그림 앞에서 거창한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마세요. 그냥 즐기면 됩니다. 그림 앞에서 춤을 추셔도 좋아요.”
아흔의 화가는 여전히 새로운 색을 만들고, 새로운 화면을 실험하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전시는 오는 8월 14일까지 화이트큐브 서울에서 열린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