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이 명확하게 들렸다면 당신이 오해한 것이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취임 초기에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말했고, 시장은 발언을 해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모호함이 권위이던 시절이다.그 이전 중앙은행의 덕목은 침묵이었다. 금리는 숫자로만 말했고, 이유는 달지 않았다. 1920년부터 24년간 영국 중앙은행을 이끈 몬터규 노먼 총재의 격언은 “절대 설명하지 말고, 절대 변명하지 말라”였다.
중앙은행의 비밀주의를 깬 것은 위기였다. 2000년대 초 닷컴 버블 붕괴 직후 Fed는 “상당 기간 완화 기조를 유지할 수 있다”는 문구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성명서에 넣었다. 통화정책 방향을 예고해 시장과 소통하는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선제 안내)의 시작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를 통화정책 수단으로 격상시켰다. 주인공은 ‘헬리콥터 벤’으로 불린 벤 버냉키 Fed 의장이었다. 그는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낮춰 더 내릴 여지가 사라지자 초저금리를 “장기간” 지속하겠다며 미래의 금리를 약속했다. 이후에는 실업률 등 구체적인 경제 지표까지 조건으로 걸며 시장을 안심시켰다. 향후 금리 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점도표도 공개했다.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준 사례도 있다. 2021년 제롬 파월 의장은 인플레이션은 “일시적”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는 뒤늦게 ‘자이언트스텝’으로 불리는 큰 폭의 금리 인상을 단행해 신뢰도에 치명상을 입었다.
케빈 워시 신임 Fed 의장은 포워드 가이던스에 비판적인 소신을 첫 번째 FOMC 회의에서 행동으로 보여줬다. 성명서 분량을 기존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약 130개 단어로 확 줄였다. 자신의 점도표는 제출하지도 않았다.
그는 “성명서에는 우리가 판단한 사실만 담았다”는 말로 포워드 가이던스 폐지를 선언했다. 지나친 약속은 중앙은행의 손발을 묶고 시장의 확증편향만 강화한다고 본 것이다. 워시의 짧은 성명서는 Fed의 태세 전환을 보여준다. ‘친절한 Fed’의 시대는 이제 끝난 것 같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