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이제 혁신을 발명하는 곳이 아니다. 과거 유산을 효율적으로 현금화하는 거대한 ‘금융 저장고’가 되었다”
FT와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이 과거 팀 쿡 체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 기사에 등장한 문구다. 실제 최근 몇 년간 애플이 보여준 모습은 ‘세상을 바꿀 무언가’보다는 ‘가진 것을 지키는 법’에 매몰된 인상을 준다. 외신은 ‘Cash-rich vault(현금이 가득 찬 금고)’ 또는 “재무적 요새(Financial fortres)"라는 표현으로 애플의 관료화를 지적했다.
애플이 창립 50주년을 맞은 올해 팀 쿡이 물러난다. 애플은 오는 9월 CEO에서 물러나 이사회 의장을 맡는다고 20일(현지시간) 밝혔다. 후임은 하드웨어 수장 존 터너스가 지명됐다. 하지만 50년 애플의 영광이 한창일 때 나온 이번 인사는 역설적으로 더 이상 과거의 성공 방식만으로 다음 시대를 장담할 수 없다는 불안을 드러낸다.
◆"숫자로 증명한 애플 제국의 수성"
팀 쿡의 퇴진은 표면적으로는 아주 질서정연한 승계다. 팀 쿡의 퇴진을 ‘실패’로 읽는 것은 사실관계에 맞지 않는다. AP와 로이터가 정리한 대로 그는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뒤 애플을 맡아 15년 동안 회사 시가총액을 약 3500억달러에서 4조달러 규모로 키웠다. 주가는 20배 뛰었다. 애플워치·에어팟·자체 칩 전환도 쿡 시대의 성과다. 웨어러블 기기와 애플페이, 애플TV+ 등 서비스 부문을 연 매출 1000억달러 규모의 거대 사업으로 키워내며 아이폰 의존도를 낮췄다. FT는 아시아를 중심으로 구축한 공급망이 애플을 정상으로 밀어 올린 유산일 수 있다고 짚었다. 쿡은 바로 ‘공급망 제국의 설계자’였다. 주주들에게 그는 '최고의 수익률'을 안겨준 구세주다.쿡의 사임 발표 직후 애플 주가는 일시적으로 흔들렸으나, 곧 안정세를 찾았다. 시장은 쿡이 닦아놓은 현금창고 위에 터너스가 '새로운 폼팩터(AI 글라스 등)'로 혁신을 재점화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쿡이 사임 후에도 이사회 의장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시장은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트럼프 행정부 등과의 복잡한 대관 업무를 쿡이 계속 맡아준다면, 새 CEO 터너스는 제품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혁신의 실종과 AI 실기
팀 쿡 체제의 성공은 동시에 혁신을 실종시킨 대가이기도 하다. AI 시대의 지각생이라는 오명도 뒤따랐다. 애플이 지난해 약속한 시리(Siri)의 핵심 AI 개선을 올해로 미뤘고, 올해 1월에는 결국 구글 제미나이를 끌어들였다고 전했다. 지난 2월에는 애플이 시리의 AI 역량을 과장했다는 주주 소송을 기각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하기도 했다. 한때 시리로 대중에게 음성비서의 시대를 연 회사가 생성형 AI 국면에선 남의 모델을 빌려와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게다가 쿡의 애플은 모험적인 혁신보다는 기존 제품의 ‘점진적 개선’에 치중하며 브랜드의 신비감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생성형 AI 경쟁에서 구글, 메타, MS에 주도권을 내준 점은 쿡의 최대 과오로 꼽힌다. ‘애플 인텔리전스’의 부진은 보안과 폐쇄성에 집착하느라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NYT는 “팀 쿡이 잡스가 만든 ‘종교’를 ‘공기업’으로 바꿔 놓았다. 혁신을 관리한 게 아니라 혁신을 없애고 대신 효율을 심었다”고 지적했다. 애플이 과거의 혁신을 뒤로하고 생태계에 포획된 충성 고객을 활용해 과도한 이익을 챙기는 '지대 추구(rent-seeking)'형 기업으로 변질했다는 지적도 있다.
◆하드웨어 전문가에 맡겨진 애플의 운명은
이번 승계의 의미는 “누가 쿡의 뒤를 잇느냐”보다 “애플이 왜 하필 지금 하드웨어 책임자를 택했느냐”에 있다. 로이터는 터너스 승진이 폴더블폰, 스마트글라스, VR 기기, AI 기기 같은 새 하드웨어에 더 집중하겠다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애플은 소프트웨어 AI 경쟁의 열세를 만회하는 방법으로, 다시 기기와 폼팩터 쪽에서 반격해보겠다는 계산을 한 셈이다. 일각에선 새 CEO가 하드웨어 전문가라는 사실은 희망이 아니라 오히려 애플의 AI 회피 본능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훌륭한 기기를 만드는 일과, AI 플랫폼을 구축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뜻이다.‘AI 시대의 애플은 어떻게 세상을 정의할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번 인사는 공급망 관리와 극단적 경영 효율로 4조달러 회사를 키운 CEO의 퇴장인 동시에, 그 방식만으로는 다음 10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애플의 자백처럼 보인다. 50년 동안 세상을 바꾼 애플이 AI 시대에 새로운 챕터를 열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지금까지 나온 답은 아직 “예”가 아니다.
한국 기업에도 팀 쿡 체제의 종언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가 관리와 주주가치 환원이 급해질수록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미래 혁신의 잠식이다. 단기 주주 친화 전략에 매달리다 성장 동력에 대한 투자를 놓치면 주가를 떠받칠 차세대 성장의 서사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시장의 압박이 커질수록 주주환원은 규율 있게 하고 혁신 투자는 더 공격적으로 가져가야 한다. 한국 기업이 지금 지켜야 할 것은 3년 뒤에도 시장이 프리미엄을 줄 수 있는 기술과 제품의 파이프라인이다. 쿡의 경영 성적표에 대해 ‘비즈니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관리자’라는 찬사와 ‘혁신의 불꽃을 꺼뜨린 관료주의자'라는 비판이 팽팽하게 맞섰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