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과 미국·이스라엘 간 전쟁이 격화되며 유조선이 공격받고 원유 수송로가 사실상 봉쇄되는 상황에서도 글로벌 금융시장은 아직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장이 전쟁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경고가 제기되고 있다.
1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이번 전쟁과 관련해 “세계 석유 시장 역사상 가장 큰 공급 차질”로 규정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지만 시장에선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는 과도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분석 기사를 내놨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은 사실상 폐쇄됐고 일부 해역에는 기뢰까지 설치된 것으로 전해졌다. 드론 공격을 받은 유조선들이 불길에 휩싸이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으며, 중동 원유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유가 급등을 막기 위해 시장 개입에 나서고 있다.
그럼에도 국제 유가는 배럴당 약 100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는 과거 중동 위기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물가 상승을 반영한 기준으로 보면 브렌트유 가격은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배럴당 179달러까지 치솟았고,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155달러를 기록했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에는 180달러 수준까지 상승했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2022년에도 유가는 130달러까지 급등한 바 있다.
WSJ은 전쟁 상황에 비해 유가 상승이 제한적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분석했다. 첫 번째는 전쟁 발발 이전 유가 자체가 낮았기 때문이다.
이번 충돌이 시작되기 전 글로벌 원유 재고는 최근 5년 사이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었고 유가는 배럴당 72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1970년 이후 물가를 반영한 평균 가격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다만 상승 속도 자체는 매우 빠르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첫 9거래일 동안 유가는 약 40% 상승했다. 이는 아랍의 봄 초기 상승률보다 훨씬 빠른 속도이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1990년 걸프전 초기 상승폭과 비슷한 수준이다.
두 번째 이유는 시장이 아직 전쟁 장기화 가능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투자자들은 이번 충돌이 몇 주 안에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지난 주말 전쟁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월요일 “전쟁이 거의 완전히 끝난 상태”라고 언급하면서 시장은 다시 안도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실제로 유가는 8일 밤 한때 배럴당 128달러까지 급등했지만 트럼프 대통령 발언 이후 상승분이 대부분 되돌려졌다. 주식시장 역시 반등했다.
예측 시장인 폴리마켓에서는 이달 말까지 전쟁이 끝날 가능성이 20%에서 43%까지 상승했다가 다시 20% 수준으로 떨어졌다.
월가 역시 점차 전쟁 장기화 가능성을 반영하기 시작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호르무즈 해협 공급 차질 지속 기간 전망을 기존 10일에서 21일로 상향 조정했다. 원유 생산과 운송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수주가 걸리기 때문에 실제 경제적 충격은 더 길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럼에도 투자자들은 이번 사태가 장기적인 공급 위기가 아니라 단기 충격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선물시장이다. 즉시 인도되는 원유 가격은 크게 상승했지만 12월 인도분 원유 가격 상승폭은 그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시장이 이번 사태를 몇 달 이상 지속되는 구조적 위기가 아니라 수주 내에 끝날 가능성이 높은 단기 충격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다.
세 번째 이유는 전략 비축유 방출이다. IEA와 회원국들은 약 4억 배럴 규모의 전략 비축유 방출에 나섰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던 원유 물량은 하루 약 2000만 배럴 수준이었는데 이 가운데 약 1500만 배럴이 차질을 겪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물량은 사우디아라비아 파이프라인을 통해 우회 수송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생산 확대가 시도되고 있다.
비축유 방출은 공급 차질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단기적으로 유가 상승 압력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증시 역시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란 전쟁이 시작된 이후 S&P500 지수는 약 3% 하락하는 데 그쳤다. 일부 국가 증시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미국 증시는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았다.
투자자들이 비교적 침착한 이유는 미국 경제가 과거보다 에너지 충격에 강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현재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자리 잡았으며 에너지 가격 상승이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과거보다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이러한 시장의 낙관론은 한 가지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바로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는 가정이다.
시장에서는 과거 경험과 정치적 상황 등을 근거로 단기전을 예상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상황이 악화될 경우 물러설 가능성이 있다는 점, 올해 미국 대선이 예정돼 있다는 점, 그리고 이란이 공습 피해를 장기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 등이 이런 전망의 근거로 제시된다.
하지만 전쟁의 향방은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란 국영 언론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새 이란 지도자의 가족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이란 지도부가 복수를 미루고 권력을 공고히 한 뒤 군사력을 재건할지, 아니면 현재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갈지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예멘 사례는 국가가 심각하게 약화된 상황에서도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계속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란은 예멘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이며, 좁은 호르무즈 해협에 기뢰를 설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교전 상황에서 이를 제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WSJ는 금융시장이 전쟁이 짧게 끝날 것이라는 가정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형 유조선 침몰이나 민간 항공기 격추, 또는 사우디아라비아 핵심 송유관 공격과 같은 사건이 발생할 경우 시장의 판단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 금융시장의 침착함은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는 기대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와 지속 기간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금은 결과를 낙관하기보다는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할 시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