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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실체를 밝히려한 정신과 의사는 '악의 카리스마'에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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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실체를 밝히려한 정신과 의사는 '악의 카리스마'에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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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수용자는 건전한 판단력과 책임 능력이 있고, 어떠한 유형의 정신병적 일탈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 정신과 의사 더글러스 맥글래션 켈리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 전범 중 한 명의 정신 상태를 평가한 뒤 보고서를 작성했다. 켈리가 이렇게 단언한 대상은 나치 독일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이었다.




    최근 국내 출간된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는 켈리가 수개월간 나치 전범의 정신 상태를 감정한 과정을 그리는 논픽션이다. 지독하게 구체적이다. 방대한 기록을 토대로 당시 나치 수뇌부를 수감한 호텔의 창문을 막은 패널의 재질까지도 적었다.


    악의 근원을 밝혀내려던 켈리가 오히려 괴링의 카리스마와 매력에 흔들리고 '악의 평범성'을 확인하는 여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입체적 심리 묘사는 한 편의 소설처럼 읽힌다. 그렇기에 러셀 크로우, 라미 말렉 주연 영화 '뉘른베르크'의 원작이 됐다.

    군의관이던 켈리가 파견된 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고위급 전범 포로 수용소로 쓰던 룩셈부르크 몽도르프레뱅 팰리스 호텔에 머물며 재판 전까지 그들의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정신적 적격성을 평가하는 임무를 맡았다.



    히틀러의 최측근으로 아우슈비츠수용소장이었던 총통 대리 루돌프 헤스, 반유대 신문 '돌격수' 발행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토대가 된 인종차별 이론 주창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등을 수차례 면담했다.

    하지만 켈리가 남몰래 세운 목표는 따로 있었다. 인류의 비극을 초래한 '나치 정신'의 본질을 확인하는 것. 전범들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어 끔찍한 인종 학살을 벌이고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는지 규명하고자 했다.


    "어쩌면 이들 정신을 과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훗날 나치와 유사한 정권의 등장을 예방하는 데 유용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필요성은 시급했다. 켈리는 공식 승인도 없는 상태에서 생포된 나치 지도자들의 정신 깊숙한 곳을 탐색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켈리의 야심과 달리 고위급 전범들은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지도자들은 특별한 부류가 아니었다. (...) 그들과 같은 사람은 미국에서도, 다른 어디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괴링의 감방 탁자 위에는 아내와 어린 딸의 사진 액자가 놓여 있었고, 그가 수감 생활에서 유일하게 불편을 토로한 건 아내와 편지로 연락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괴링이 당에 충성을 바친 건 히틀러나 독일, 아리안 종족을 보전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나치당의 '비(非) 아리아인은 열등하다'는 주장을 믿는지 켈리가 묻자 괴링은 잘라 말했다. "그 헛소리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괴링이 무수한 악행을 벌인 원동력은 고작 입지를 높이고 싶은 마음, 성공에 대한 이기적 욕구에서 비롯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켈리는 악의 평범성과 인간의 취약성을 자신의 인생으로 증명했다. 그는 점차 가정의 독재자로 군림한다. 군사재판 이후 켈리는 누구라도 전범이 될 수 있고 미국도 독일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설파했다. 책을 내고 강연을 다녔다.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의 범죄학부로 소속을 옮긴 뒤로는 경찰과 변호사에게 범죄 심리 자문을 했다. 이 업무는 켈리 안에 있던 편집증과 불안, 공포를 자극했고 가족에게 종잡을 수 없이 분노를 퍼부었다. 말다툼 끝에 아내에게 총구를 겨누는 일까지 벌였다. 끝내 켈리는 괴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도구로 택한 청산가리를 가족들 앞에서 삼키며 파멸했다.

    괴링의 평범성과 켈리의 잔혹함이 바통 터치하듯 이어지는 책의 구성은 아이러니하다. 책을 우리말로 옮긴 채재용 번역가는 어떤 집단을 단순화하는 움직임이나 혐오의 언어에 대한 자기 점검을 촉구하며 "전쟁은 종종 국경에서 시작되지만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은 국경 없이 전염된다"고 지적했다.

    "누구도 악의 면역을 가진 적이 없으니 우리는 학습해야 한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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