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6,307.27

  • 223.41
  • 3.67%
코스닥

1,188.15

  • 22.90
  • 1.97%
1/2

"음악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장면" …임윤찬·조성진·김선욱·선우예권 한 무대에 섰다

페이스북 노출 0

핀(구독)!


뉴스 듣기-

지금 보시는 뉴스를 읽어드립니다.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음악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장면" …임윤찬·조성진·김선욱·선우예권 한 무대에 섰다

주요 기사

    글자 크기 설정

    번역-

    G언어 선택

    • 한국어
    • 영어
    • 일본어
    • 중국어(간체)
    • 중국어(번체)
    • 베트남어
    클래식 음악계가 상상만 하던 일이 현실이 됐다. 김선욱, 선우예권, 조성진, 임윤찬 등 한국 정상급 피아니스트 4명이 한 무대에 올랐을 뿐 아니라 동시에 연주하는 일이 일어났다. 공연 해설을 맡은 조은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도 “100년 후 한국 음악사를 회고할 때 기록될 장면이 아닐까 상상한다”고 했을 정도다.




    이 꿈 같은 무대는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펼쳐졌다. 고(故) 정주영 현대차그룹 창업회장의 25주기를 기리고자 현대차그룹은 김선욱과 수년 전부터 이 음악회를 준비했다. 2006년 영국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해외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피아니스트로서 후배들의 길잡이가 돼준 그였기에 후배들도 이번 추모에 함께 했다. 현대차그룹도 현대차 정몽구 재단을 통해 한국인 음악가들을 후원해 오며 음악계를 지원했다. 이 재단이 해마다 여는 계촌클래식축제엔 이날 무대에 오른 피아니스트 4인이 모두 활약한 이력이 있다.

    숨쉬는 구조물을 쌓은 김선욱과 조성진


    이날 열린 ‘아산 정주영 서거 25주기 추모 음악회: 이어지는 울림’ 공연에 앞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영부인인 김혜경 여사 등 주요 내빈들을 맞이했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정기선 HD현대 회장 등 범(凡)현대가 일원이 아산의 정신을 기렸다. 우원식 국회부의장을 비롯해 나경원·권영세 국민의힘 의원, 김용범 정책실장,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등 정계 인사뿐 아니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명예관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김재열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회장 등 재계 인사도 함께했다.

    아산의 뜻을 울림으로 계승하려는 공연은 구성도 파격이었다. 피아니스트 4인이 독주를 하는 레퍼토리는 하나도 없었다. 현대차그룹과 김선욱은 고 정 회장의 삶과 정신을 반영할 수 있는 곡들을 모아 2명 내지 4명이 한데 연주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짰다. 추모 영상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추모사, 조 교수의 공연 소개가 이어진 뒤 김선욱과 조성진이 나란히 무대에 올랐다. 피아노 한 대에 모인 둘은 따로 의자를 두고 앉아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 바단조’를 연주했다.





    김선욱과 조성진이 한 피아노를 쓰는 모습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겐 친숙하다. 이들은 2024년 계촌클래식축제와 지난해 12월 빈체로 창사 30주년 콘서트에서도 피아노 한 대 앞에 나란히 앉아 연주했다. 정장과 검은 넥타이 차림으로 추모의 뜻을 살린 이들의 모습처럼 시작은 엄숙했다. 김선욱이 조심스럽게 건반을 다루는 새 조성진이 오른손을 얹었다. 정제된 멜로디에 익숙해졌을 즈음, 강렬한 소리와 함께 둘의 상체가 물 위의 돌고래처럼 동시에 튀어 올랐다.


    두 피아니스트는 서로 동기화한 것처럼 정교하게 다이내믹(음의 강약을 다루는 과정)을 조절했다. 그러면서 개성도 뚜렷했다. 김선욱의 저음이 고뇌 속에서 소신을 담아내는, 묵직하면서도 깔끔한 소리에 가깝다면 조성진의 고음은 그 소리를 옷감 삼아 노니는 현란한 바느질 같았다. 둘의 개성이 섞인 결과물은 기묘했다. 음악이 견고한 구조물처럼 형체를 이루고 있는데 이 구조물이 유기체처럼 숨을 쉬듯 출렁거리는 인상이었다. DNA의 이중 나선 구조처럼 두 피아니스트의 소리가 엮였다가 풀리길 반복했다. 미래 문명이 만들 법한 유기체 건물을 음악으로 목도하는 듯했다. 자신만의 색을 지키면서 서로 조응할 수 있는 연주자만이 선사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선우예권과 임윤찬, 공연장에 와인을 붓다


    다음 연주는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선후배인 선우예권과 임윤찬이 맡았다. 무대엔 피아노 2대가 의자를 서로 포개 놓은 식으로 자리했다. 피아노 현이 무대 중앙이 아니라 측면에 가까운 쪽에 자리해 소리의 공간감을 살리기 좋았다. 연주곡은 라흐마니노프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2번. 교향곡 1번의 흥행 실패에 충격받아 3년간 절필했던 라흐마니노프가 재기하며 쓴 곡이다. 1악장은 임윤찬이 만드는 풍부한 질감과 선우예권의 맑은 질감이 서로의 음악에 스며드는 과정이었다.





    왈츠인 2악장에선 둘의 음악이 한 끼의 미식이었다. 임윤찬의 세 박자 춤곡 리듬이 공간감을 폭넓게 채우는 와인이라면 선우예권의 선율은 고막을 잇달아 때리며 자극하는 ‘킥’이었다. 임윤찬이 음량을 능숙하게 다루면서도 풍부한 질감을 놓치지 않으며 ‘밀당’을 하듯 관객들의 집중도를 한껏 높여놓은 사이, 선우예권의 명료한 터치가 맛깔을 내며 이완의 쾌감을 선사했다. 악장이 끝나자 임윤찬은 선우예권과 서로 바라보더니 오묘한 미소를 건넸다.

    느린 리듬으로 풀어간 3악장은 둘의 마리아주(와인과 음식의 궁합)를 천천히 음미할 기회였다. 공연장을 입안으로 쓰듯 두 소리가 서로의 잔향을 감싸며 총체적으로 기분 좋은 청각 반응을 일으켰다. 임윤찬이 수차례 선우예권을 바라보며 합을 맞추려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두 피아니스트가 에너지를 쏟아낸 마지막 4악장에선 천장을 두드리며 알알이 떨어지는 음들과 넘실거리는 음향으로 공연장이 꽉 찼다. 이따금 건조하게 느껴지던 예술의전당이 피아노 2대만으로 촉촉해지는 순간이었다.

    피아노로 만든 음악의 우주

    공연 2부에선 피아노 네 대, 연주자 네 명이 한꺼번에 무대에 올랐다. 첫 곡은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의 서곡을 리스트가 피아노로 편곡한 버전. 타락의 유혹에서 벗어나려 투쟁하는 탄호이저의 이야기가 기승전결로 담긴 작품이다. 선우예권이 타건을 시작하자 다른 세 명이 차례대로 호응하며 소리의 밀도를 높였다. 제각기 다른 카리스마를 지닌 피아니스트 네 명이 크레셴도(점점 세게)로 음량을 키울 땐 교향곡의 웅장함이 재현됐다.



    김선욱이 단단하게 쌓은 화음은 후배들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음악적 사다리가 됐다. 선우예권과 조성진이 만든 대위법적인 선율은 이 사다리를 받치다가도 태양의 플레어처럼 튀어 올라 독자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다리에 오르는 역할은 임윤찬이 맡았다. 깊이감을 지키면서도 현란한 속주를 보여준 그는 선배들이 만든 음표의 은하수에 별처럼 반짝이는 고음들을 수놓았다. 네 피아노의 소리를 뭉쳐 듣는 것만큼이나 소리별로 가려 듣는 즐거움이 컸다. 크게 보면 장엄하고 작게 봐도 경이로운 소우주였다.

    마지막 곡인 ‘헥사메론’은 리스트, 탈베르크, 체르니, 쇼팽 등 19세기 스타 피아니스트였던 6명이 각각 변주를 하나씩 맡아 만든 노래다. 이번 공연에선 작곡가 이하느리가 헥사메론을 피아노 4대에 맞게 편곡한 버전이 쓰였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드러내려 했던 작품이 화합의 울림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이하느리의 편곡 버전은 강렬한 소리를 서로 충돌시켜 초장부터 관객을 소리로 압박했다. 피아니스트들은 축구 선수가 빠른 패스로 공을 주고받으며 역습하듯 곡의 주제를 재빠르게 서로 넘겨받아 연주했다. 긴장이 고조될 땐 피아노가 트롬본처럼 우렁찬 소리를 내며 관객을 밀어붙였다. 마지막엔 여느 교향곡 마지막 악장의 피날레처럼 8개의 손 각각이 힘을 쏟아내는 악기가 됐다.

    자리를 바꾸어가며 울림을 낸 네 음악가

    2시간에 걸친 프로그램이 끝나자 네 명의 피아니스트는 나란히 서서 관객에게 인사했다. 맏형인 김선욱이 조성진의 등에 손을 올리면 조성진이 임윤찬에게, 임윤찬이 선우예권에게 똑같이 행동해 네 음악가가 나란히 등을 맞대어 서 있는 구도가 나왔다. 커튼콜로 올라온 이들이 일렬로 섰다가 홀로 앞에 튀어나온 걸 발견한 조성진이 뒷걸음쳤을 땐 객석에서 긴장이 풀린 웃음이 나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번갈아 포옹하며 서로를 응원하는 모습은 이 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앙코르는 두 곡이었다. 연주자들은 피아노 8대로 연주하기도 하는 생상스 ‘죽음의 무도’를 선보인 뒤 프랑스 작곡가 샤를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중 ‘왈츠’를 연주했다. 네 명은 연주곡마다 무대 앞 열에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위치도 바꿨다. 탄호이저 서곡에선 임윤찬과 김선욱이, 헥사메론에선 선우예권과 조성진이 앞에 앉았다. 앙코르 첫 곡에선 임윤찬과 선우예권이, 마지막엔 조성진과 선우예권이 자리하며 다채로움을 더했다. 앙코르가 끝나기 전까지 자리에서 일어선 관객을 찾기가 어려웠을 정도로 저마다 흘러가는 매 순간이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실시간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