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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항해의 역사를 바꾼 경도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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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항해의 역사를 바꾼 경도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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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성 위치 확인 시스템(GPS)’ 같은 각종 첨단 과학기술 덕에 항공기와 선박, 차를 탈 때 어렵지 않게 지도 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끝없는 수평선이 펼쳐지고, 어디를 둘러봐도 파도만 출렁이는 바다에서 가로·세로로 상상의 선을 긋고선 자신이 있는 곳을 확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념상으론 ‘적도와 평행선’인 위도와 ‘남극과 북극을 잇는 선’인 경도는 인류사의 초기에 등장했다. 경도와 위도의 개념이 나온 근거는 기원전 2~3세기부터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는 27장의 크고 작은 ‘세계지도’가 포함됐는데, 이 지도 위에 알파벳순으로 지명과 색인을 달고 선을 표시한 뒤 위도와 경도를 병기했다.


    위도에 대해선 프톨레마이오스 당시부터 이견이나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위도 개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적도가 ‘위도 0도’가 됐다. 기준선뿐 아니라 낮의 길이와 태양의 높낮이, 별자리 등을 통해 측정자가 자리 잡은 곳의 위도를 판단하는 기술도 고대부터 꾸준히 축적됐다.

    하지만 경도는 사정이 사뭇 달랐다. ‘경도 0도’인 본초자오선은 위도처럼 자연적으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를 만드는 사람에 따라 본초자오선의 기준이 그때그때 달라졌다. 아조레스 제도를 비롯해 로마, 코펜하겐, 예루살렘,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사, 파리, 필라델피아가 모두 본초자오선의 기준점이 된 전력이 있다. 결국 최종적으론 19세기 대영제국의 힘을 바탕으로 런던(그리니치천문대)으로 ‘경도 0도’가 지나는 지점이 낙착됐다. 본초자오선의 위치를 정하는 것은 정치적 문제였다.


    기준을 정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자리한 지점의 경도를 판정하는 일은 지난한 과제였다. 위도와 달리 경도의 자오선을 측정하는 일은 시간에 좌우됐다. 바다에서 경도를 알려면 배가 있는 곳의 시각과 바로 그 순간 배가 출발한 모항 또는 이미 경도를 아는 한 지점의 시각을 동시에 알아야 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두 지점의 시간을 모두 안다 해도 시계가 제대로 작동하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시계는 속도가 마구 변했고, 멈추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온도와 습도 변화에 따라 시계 부품이 수축과 확장을 거듭한 탓이다. 기압과 위도 차에 따른 중력 변화도 시계가 제각각으로 돌아간 원인이다.



    제대로 된 기초 관측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15~17세기 바다에 나간 선장들은 모두 배가 모항의 동쪽이나 서쪽으로 얼마나 멀어졌나를 측정하기 위해 ‘추측항법’을 사용했다. 추측항법이란 바다 위에 줄이 풀리는 정도에 따라 배의 속도와 이동 거리를 재는 장치인 측정기를 던져놓고 임시 이정표로부터 얼마나 빨리 멀어지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조잡한 수준의 속도 측정값을 확보한 후, 별이나 나침반으로 확인한 방향을 추가해 위치를 계산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론 해류의 영향과 변덕스러운 바람의 변화라는 변수를 통제할 수 없었다.

    실패가 반복되면서 어느덧 경도를 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과 동의어가 됐다. 위대한 탐험가든 숙련된 뱃사람이든 모두 예외 없이 경도를 재지 못한 탓에 바다에서 길을 잃고는 했다. 경도를 모르는 배는 침몰할 수밖에 없었고, 침몰하지 않았더라도 표류를 거듭하다가 사람들은 괴혈병이나 식량 부족 등에 시달려 서서히 죽어갔다. 희망봉을 돌았던 바스쿠 다가마와 태평양을 발견한 바스코 누네스 데 발보아, 최초의 세계일주자 페르디난드 마젤란, 위대한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은 경도를 알지 못한 탓에 대양을 방황해야 했다.


    경도를 모른 까닭에 대양을 오가는 배들은 ‘안전한’ 소수의 비좁은 항로를 이용했다. 배들이 모두 위도만 파악하면서 항해한 까닭에 육지에서 멀지 않은 좁은 항로에 상선과 전함, 해적선이 서로 뒤엉켜, 싸우고 희생되기를 거듭했다.

    경도 측정의 필요성이 커지고, 절실해질수록 경도 문제를 푸는 것은 국가적 과제가 됐다. 경도 문제 해결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영국 조지 3세가 경도 문제에 직접 관여했고, 유럽 각국의 천문학자들도 해법 도전에 나섰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장 도미니크 카시니,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아이작 뉴턴, 에드먼드 핼리 등 기라성 같은 과학자들은 경도 풀기 도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런 와중에 경도를 찾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생겼다. 1707년 10월 22일 영국의 한 해변 근처에서 생긴 ‘비극적 사건’이 인류사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클로디슬리 경이 이끄는 영국 전함 4척은 경도를 잘못 파악한 탓에 표류하다가 암초를 만나 잇따라 좌초했다. 2000여 명의 승무원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비보를 접한 영국 정부는 경도 파악을 국정의 급선무로 삼았다. 영국 의회도 1714년에 그 유명한 ‘경도법’을 제정하며 “경도를 측정하는 실행 가능하고 유용한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 2만 파운드라는 거액의 상금을 내걸었다. 대권(지구를 그 중심을 지나는 평면으로 자를 때 생기는 원)의 2분의 1도 이내로 정확하게 경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거액의 포상금을 약속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인류의 숙원을 푼 이는 명성이 자자한 과학자도, 산전수전 다 겪은 선원도 아닌 뜻밖의 인물이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무명의 시골 시계공 존 해리슨이 발상 전환을 이끈 주인공이었다. 배가 제아무리 요동을 쳐도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며 하루에 3초 이상 틀리지 않는 시계를 해리슨이 만들면서 판이 근본적으로 뒤집혔다. 낮이고 밤이고, 기상 상황과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경도 측정의 도구를 손에 쥘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해리슨은 무려 40여 년간 ‘H-1’ ‘H-2’ ‘H-3’ 및 ‘H-4’라는 이름의 시계 4개를 만들면서 경도를 재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1773년 6월 경도법 수상자로 인정돼 막대한 상금을 받았다. 그의 나이 80세 때 일이었다.

    경도를 알게 된 이후 바다를 바라보는 인류의 시선은 바뀌었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과 해상 이동의 위험은 크게 감소했다. 해상교역의 확장과 제국주의의 발전, 산업혁명의 촉진 등은 경도측정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거나 크게 지연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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