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써 5년이 다 돼 가는데 어떠한 법도 바뀐 게 하나도 없잖아요."
지난 6일 서울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성범죄 피해자 유가족 협의체' 소속 박영수 씨(오창 여중생 투신사건 유가족)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021년 5월 박 씨의 딸과 친구는 친구 계부로부터 성범죄 피해를 당했고, 두 아이 모두 투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눈시울을 붉혔다. 박 씨는 사건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우울증 약을 복용 중이다.
이날 자리에는 협의체 대표인 서민선 더불어민주당 청년정책연구위원도 함께했다. 협의체는 성범죄 피해 당사자나 피해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인의 유가족들로 구성된 단체다. 지난 한 해 동안 성범죄 수사 과정의 구조적 문제와 피해자 보호 체계 미비 등의 개선을 요구해 왔다. 최근에는 수사가 미진했던 성범죄 사건들의 재수사를 요청하는 국민청원을 준비 중이다.
두 사람은 5년이 지났지만 성범죄 수사 시스템과 피해자 보호 체계가 제자리걸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부실 수사에 대해 국가는 책임을 여전히 회피하고 있고,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피해자는 더 큰 사각지대에 놓였으며 처벌 기준마저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을 내놨다.
◇ "피해 아동이 직접 범죄 현장 사진 찍어 제출"

박 씨는 사건 발생 5년이 지났지만 수사 미흡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지난해 대법원에서 기각으로 마무리되면서 사법부의 실질적 판단조차 받지 못한 채 종결됐다.
그는 "경찰은 자체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수사가 미흡했지만 법적 책임은 없다'고 결론 내렸고, 법원마저 심리조차 하지 않고 기각했다"며 "마치 국가가 유족에게 '어쩌라고'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수사 과정의 구체적 문제점도 지적했다. 박 씨는 "경찰이 야간 근무 중이었음에도 현장 출동 조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며 "결국 가해자인 계부와 한집에 사는 중학교 2학년 피해 아동이 '방문 틈으로 범행 장면이 보이는지' 입증할 현장 사진을 직접 찍어 경찰에 전달해야 했다"고 성토했다.
이어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리되지도 않은 공간에서 아이가 직접 범죄 현장을 채증하게 만든 것 자체가 말이 되느냐"며 "'정인이 사건' 이후 두 번 신고되면 의무적으로 분리 조치하게 돼 있었음에도 청주시와 경찰은 서로 책임을 떠넘겼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검경 수사권 조정의 그늘… "피해자는 '핑퐁 게임'의 희생양"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발생한 '수사 핑퐁' 문제와 함께 검찰청 폐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박 씨는 "지금 시스템은 경찰이 알아서 수사해 송치 여부를 결정하는데, 보완 수사 요구만 반복되다가 영장이 두 번이나 기각됐다"며 "경찰은 3개월 동안 친모에게 '해바라기 센터 녹화 진술을 위해 참석하라'고 전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책임을 묻거나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서 검찰까지 폐지되면 경찰이 과연 스스로 '수사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고 덧붙였다.
서 위원은 검찰청 폐지 시 발생할 '피해자 구제 공백'을 우려했다. 그는 "검경이 존재하는 이유는 서로를 견제하기 위함인데, 검찰청을 '실패한 기관'이라며 바로 없애버리는 건 정치권이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라며 "경찰 내부 비리나 부실 수사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지적하고 보완 수사를 요구할 외부 기관이 사라지는 셈"이라고 역설했다.
서 위원은 "결국 힘없는 피해자들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이의를 제기할 곳조차 없어지게 된다"며 "경찰 수사 단계에서 부실 수사와 사건 은폐를 방지할 대책도 함께 검토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 "젠더 갈등 아닌 시스템 개선으로… '고무줄 판결' 없애야"
캐나다 유학 시절 성범죄 피해를 본 당사자이기도 한 서 위원은 정치권이 성범죄 문제를 진영 논리나 남녀 갈등의 도구로만 이용하는 현실을 비판했다.서 위원은 "이 문제를 남녀 갈등을 최고조로 일으켜 주목받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며 "우리 단체 멤버 중에는 남성이 남성에게 성범죄를 당한 경우도 있다. 이는 단순한 남녀 갈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겪은 불행"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성별이 아니라 범죄자와 비범죄자를 구분하고, 정부와 기관이 놓치고 있는 수사 방식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관성 없는 처벌 기준도 언급했다. 서 위원은 "누군가는 논란이 됐다고 25년형을 받고, 다른 사람은 1년6개월형을 받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며 "법적으로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짚었다.
박 씨는 성범죄 처벌 자체가 지나치게 가볍다는 점도 꼬집었다. 그는 "흔히 강간을 '영혼의 살인'이라 부르지 않느냐"며 "피해자는 평생 고통 속에 사는데 가해자 처벌은 살인죄에 비해 너무 약하다"고 호소했다. 딸이 겪은 고통을 떠올리며 그는 "피해자는 평생 지옥에서 사는데 가해자는 고작 몇 년 살고 나온다"며 "그럴 거면 차라리 '영혼의 살인'이란 말을 쓰지 말라"고 했다.
박 씨는 "진짜 어린아이들은 세상이 공평하고 제대로 된 세상이라고 믿는다. 당연하게 믿어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내 복잡한 표정으로 그는 반문했다.
"15살짜리가 그런 절망을 할 정도로 도대체 세상은 뭐 하는 건가. 대부분 사람들은 당연히 국가를 믿고 국가가 국민을 위해 수사를 제대로 해주겠지 생각한다. 제가 잘못 생각하는 건가. 아니지 않나."
이정우 한경닷컴 기자 krse905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