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간 철저히 기업간거래(B2B)에 머물렀던 반도체 기업들이 최근 소비자접점(B2C)을 겨냥한 ‘굿즈 비즈니스’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HBM(고대역폭메모리)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중적 관심을 기업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데 활용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5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후공정 장비 업체 한미반도체는 최근 네이버스토어에 공식 굿즈 스토어를 열었다. B2B 기업인 반도체 장비 업체가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굿즈 스토어를 연 것은 한미반도체가 국내에서 처음이다.
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와 HBM 제조의 핵심 장비인 열압착(TC)본더를 공동 개발해 최근 ‘HBM 열풍’을 이끈 기업으로 꼽힌다. 지난해 3분기까지 매출 4936억원, 영업이익 2237억원을 기록하는 등 ‘슈퍼 을’ 기업으로 떠올랐다.
한미반도체는 팝 아티스트 필립 콜버트와 협업한 의류 제품을 비롯해, 국내 블록 제조사 옥스포드와 함께 만든 TC본더 레고 등 총 10종의 상품을 선보였다. 이 가운데 레고와 모자, 립밥 등 제품 3종은 출시 직후 품절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앞서 HBM 열풍의 진원지인 SK하이닉스 역시 굿즈 실험에 성공한 바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11월 세븐일레븐과 협업해 HBM칩의 네모난 모양을 살린 ‘허니바나나맛 HBM칩스’라는 과자를 내놨다. 이 과자는 출시 후 완판을 이어가며 8주만에 35만개가 팔렸다. 기술 용어로만 여겨졌던 HBM이 대중 소비재로 재해석된 사례다.

그간 국내 반도체 업계에선 굿즈를 만들어도 대부분 사내 복지나 방문객 선물 용도로 활용해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직원 선물용으로 제작했던 반도체공장(팹) 레고가 대표적인 사례다.
삼성전자는 2019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추상화 거장 몬드리안의 그림을 외벽에 구현한 반도체 공장 레고를 만들었다. SK하이닉스 역시 회사 내 다양한 반도체 공장들을 구현한 레고를 제작해 직원들에게 나눠준 바 있다. 이들 제품은 현재는 단종됐지만, 잔여 물량이 온라인 쇼핑몰과 중고 거래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굿즈 마케팅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 사이에서 더 활발하다. 엔비디아는 오프라인 행사와 팝업스토어를 통해 다양한 굿즈를 선보이며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인텔은 로고가 박힌 의류와 문구류는 물론 반려동물 용품과 요가 스트레칭 밴드까지 온라인 스토어에서 판매 중이다. TSMC는 2022년 창립 35주년을 맞아 스타벅스와의 협업을 통해 반도체 회로가 구현된 머그컵 등 굿즈를 출시해 매니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장비 업계의 ‘슈퍼 을’로 불리는 ASML도 예외가 아니다. ASML은 창립 40주년을 맞아 대당 수천억 원에 달하는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트윈스캔 EXE:5000’을 레고와 협업해 상품화했다. 260달러에 달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기술 상징성을 담은 굿즈로 주목받았다. 램리서치 등 다른 장비 기업들도 온라인 스토어를 통해 굿즈 판매를 이어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의 배경에는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대중 인식의 변화가 있다. 과거에는 기술력과 고객사가 곧 브랜드의 전부였지만, 최근에는 반도체가 주식·산업·미래 기술 담론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일반 소비자와의 접점이 빠르게 넓어졌다. 업계에서는 굿즈가 단기 수익보다는 브랜드 자산을 축적하는 장기 투자라는 평가가 나온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