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차별적 각자도생의 흐름 속에서 어떤 국가는 기술 패권의 수혜를 입으며 도약했지만, 어떤 국가는 정책적 불확실성의 늪에 빠져 위기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제 동남아시아는 단순히 환율만 놓고 보면 더 이상 하나의 공동체가 아닌, 각기 다른 엔진으로 달리는 개별적인 경제 생태계로 변화하는 중이다. 작년과 올해 1월까지 가장 독보적인 성과를 거두며 글로벌 자본의 찬사를 받은 통화는 단연 말레이시아 링깃(MYR)이었다. 링깃은 2025년 한 해 동안 달러 대비 약 10%에 육박하는 강력한 통화 가치 상승을 기록하며 아시아 내 최고 수준의 퍼포먼스를 과시했다.
이러한 비상은 단순히 일시적인 자본 유입의 산물이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산업 체질 개선이 시장의 확고한 신뢰를 얻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2026년 1월 발표된 잠정치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의 2025년 4분기 GDP 성장률은 5.7%를 기록하며 시장의 예상을 크게 웃돌았다. 글로벌 AI 반도체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동남아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페낭을 중심으로 반도체 후공정 및 데이터 센터 유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 링깃을 지역 내 가장 매력적인 테크 통화로 격상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링깃의 강세는 단순히 환율의 숫자를 넘어, 한 국가가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고리를 장악했을 때 통화 가치가 어디까지 견고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가 되었다.
반면, 2026년 1월 현재 동남아시아 경제에서 가장 위태로운 행보를 보이는 국가는 인도네시아다. 인도네시아 루피아(IDR)는 2026년 1월 20일 기준 달러당 16,988루피아를 기록하며 사상 최저치를 경신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1월 29일에는 자카르타 종합지수(JCI)가 장중 한때 10% 가까이 폭락하며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폭락의 배경에는 지배구조와 정책 독립성에 대한 시장의 깊은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 대통령이 조카인 토마스 지완도노(Thomas Djiwandono) 재무 차관을 중앙은행(BI) 부총재로 지명하면서 독립성 훼손 우려가 확산되었고, MSCI가 인도네시아 시장의 투자 편의성 리스크를 지적하며 지수 업데이트를 동결하자 자금 유출이 가속화된 것이다. 인도네시아 금융감독청(OJK)이 상장사 유동주식 비율 상향 등 긴급 대책을 내놓으며 증시가 가까스로 진정세를 보였으나, 전문가들은 정부의 포퓰리즘적 지출 확대와 중앙은행의 정치적 도구화 우려가 해소되지 않는 한 약세 흐름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정교한 통화 관리로 버팀목 역할을 수행한 싱가포르 달러(SGD)와는 대조적인 결과다.

수출 주도형 경제의 표본인 베트남 역시 기록적인 성장세 이면에 환율 압박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다. 2025년 베트남의 총수출액은 전년 대비 무려 17%나 급증한 약 4,750억 달러를 기록했으나, 이 화려한 성적표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관세 보복과 환율 조작국 재지정 우려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미국은 베트남의 과도한 무역 흑자를 경계하며 환율의 투명성을 끊임없이 압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베트남 중앙은행은 수출 경쟁력 유지와 통화 가치 안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다. 2026년 1월 말 현재 베트남 동(VND) 환율이 달러당 26,000동 선을 상회하고 있는 상황은, 수출 성장의 수치에 환호하기보다 이면에 숨겨진 국제 무역 질서의 변화와 외교적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실질적인 환율 방어의 핵심임을 시사한다.
태국 바트(THB)와 필리핀 페소(PHP) 또한 변동성의 파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태국 바트는 관광 산업 정상화에 힘입어 2025년 중반 가치가 16%까지 급등했으나, 글로벌 관세 전쟁의 전운과 정치적 불확실성이 겹치며 절상 폭을 상당 부분 반납한 채 8% 수준에서 균형을 찾으려 고군분투 중이다. 특히 과거 외환 위기를 공유했던 인도네시아의 혼란은 지역 전체의 리스크 프리미엄을 높이며 바트의 향후 추이를 예단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필리핀 페소 역시 외국인 직접투자(FDI) 둔화 속에 내수 중심 경제 구조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수혜를 충분히 흡수하지 못하는 약세 흐름을 지속하고 있다.
결국 시장은 이제 더 이상 외부 금리 지표에만 일방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말레이시아처럼 대체 불가능한 공급망 지위를 확보했는지, 혹은 인도네시아처럼 정책적 신뢰를 유지하고 있는지가 통화 가치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잣대가 되었다. 사상 최고치의 수출액을 기록한 베트남과 사상 최저치를 경신한 인도네시아 루피아, 그리고 기술 허브로 도약한 말레이시아 링깃의 대비는 거시 경제의 파고 속에서 국가를 지탱하는 최후의 무기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동남아시아의 긴박한 흐름은 한국 경제에도 매우 묵직하고 날카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우리 역시 반도체 수출 호조라는 성과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구조적 결함을 해결하고 투자자들에게 확고한 정책적 신뢰를 주어야만 원화 가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2026년 남은 기간에도 국가 간의 실력 차이가 만드는 격차는 글로벌 외환시장의 판도를 더욱 극명하게 가를 것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이성득 인도네시아 UNAS경영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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