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롤 한 번에 휘발되는 릴스, ‘좋아요’에 매몰된 밈(meme). 최근 영화 배급사들은 소셜미디어로 입소문을 태우는 디지털 바이럴에 사활을 걸어왔다. 흥미를 자극하는 영상이 개봉 전 타임라인을 가득 채웠다. 불행히도, 그 효과는 미미했다. 2012년 이후 처음으로(팬데믹 시기 제외) ‘천만영화’를 단 한 편도 배출하지 못한 지난해 영화시장 성적표가 그 근거다. 개봉 전부터 ‘낚시성’ 콘텐츠가 소비되며 되레 피로감이 높아진 탓이다. 씨네필도 발길을 돌렸다.
깊은 불황의 골짜기, 영화계가 찾은 마케팅 활로는 전혀 다른 곳을 향한다. 일부 영화들은 스크린 바깥에 영화적 공간을 구축하고, 관객이 직접 세계관을 탐구하도록 하는 정공법을 택한다. 일방적 ‘광고’ 대신 극장 관람의 상호적 교감을 회복하겠다는 의도다.
◇‘박정민 사진전’ 내건 ‘휴민트’
다음달 11일 개봉하는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는 극장가의 화제작이다. 블라디보스토크 국경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파헤치다 만난 남북한 비밀 요원의 격돌을 그린 영화는 묵직하고 서늘한 첩보 액션물의 질감을 가졌다. 설 연휴를 앞두고 ‘명절 흥행작’의 계보를 이을 수 있을지도 영화계의 관심사다.이 영화를 배급하는 NEW는 지난 12일부터 2주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이간수문 갤러리에서 ‘휴민트 기획전’을 열었다. 촬영 현장의 비하인드를 담은 미공개 스틸과 예고 영상을 선보이는 특별전. 전시장에 걸린 사진들은 관객의 상상을 선명하게 바꾼다. 영화의 메인 배경인 블라디보스토크와 비슷한 풍광을 지닌 라트비아 현지 촬영 당시의 날카로운 겨울 공기와 정취를 김진영 작가가 찍은 스틸 이미지로 보여줬다. 이 전시의 사전 예약자는 2500명을 넘겼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배우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 전시에 출품된 70점의 작품 중 35점은 김 작가의 공식 스틸이 아닌 배우 박정민의 작품이다. 북한 국가보위성 조장으로 대한민국 국정원 조 과장(조인성)과 대립하는 박건 역을 맡은 박정민은 필름과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라트비아의 거리와 동료의 얼굴을 렌즈에 담았다.
◇거래소 찾은 멜라니아, 상영회까지
배급사나 홍보사가 주도하는 마케팅 문법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이나 관객이 직접 마케팅의 주체가 되는 사례도 눈에 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인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멜라니아’ 개봉을 앞두고 전면에 나섰다. 백악관에서 비공개 시사회를 연 데 이어, 28일 뉴욕증권거래소를 찾아 개방 벨을 울릴 예정이다.지난해 한국영화 최고 수작 중 하나로 꼽히는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도 기존의 마케팅 문법을 해체한 사례다. 영화인과 관객이 작품의 생명력을 연장했기 때문이다. 김혜수, 박정민, 고아성 등 영화를 관람한 영화인과 제작사들이 직접 상영관 좌석을 구매해 관람 기회를 제공하는 릴레이 응원 상영회를 열었다. 약 1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작은 영화지만, 영화계의 지지와 ‘N차 관람’을 자처하는 팬들의 상호작용이 맞물리며 누적 19만 명의 관람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냈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