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전 세계 성악가들에게 ‘꿈의 성전’으로 통한다. 유럽의 고전적 전통과 미국의 거대 자본, 그리고 세계 최고의 비평 네트워크가 맞물린 이곳은 당대 최고의 가수만이 설 수 있는 검증의 무대다. 그동안 홍혜경, 조수미를 시작으로 수많은 한국 성악가들이 이 무대를 밟았지만, 유독 메조소프라노 성부만큼은 철옹성과 같았다. 서구 가수들의 압도적인 성량과 깊은 저음 사이에서 한국 메조소프라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좁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지난 9일(현지시간) 마침내 그 견고한 벽이 무너졌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스즈키’ 역으로 무대에 오른 메조소프라노 김효나(사진)가 한국 메조소프라노 사상 최초로 메트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이다. 공연 후 전화 인터뷰에 응한 김효나는 “커튼이 열리고 관객석의 함성이 들려오는 순간 비로소 메트 무대에 섰다는 것이 실감 났다”며 “여기까지 오는 데 참 오래 걸렸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효나의 이번 데뷔는 화려한 콩쿠르 우승을 통한 ‘깜짝 스타’의 탄생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는 스스로를 “느린 걸음의 성악가”라고 부른다. 실제로 그는 스즈키 역 하나로만 전 세계 13개 이상의 프로덕션에서 100회 넘게 무대에 섰다. 한 배역을 수많은 지휘자 및 연출가와 호흡하며 연마해온 전문성이 보수적인 메트의 캐스팅 관행을 뚫어낸 것이다.
이번 안소니 민겔라 연출의 ‘나비부인’에서 그는 스즈키를 단순한 하녀가 아닌 주인공 초초상의 동반자로 그려냈다. 김효나는 “스즈키는 관객을 대신해 울어주는 화자”라고 정의하며 “초초상 역의 아이린 페레스와 수평적인 관계에서 감정을 교감하며 노래한 ‘꽃의 이중창’은 특별한 리허설 없이도 숨결이 하나로 맞물리는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전했다.
이번 무대는 한국 성악계의 위상을 확인시켜준 자리이기도 했다. 김효나를 비롯해 테너 백석종, 바리톤 차정철 등 총 4명의 한국 성악가가 한 프로덕션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무대 뒤에서 한국 동료들의 농담 섞인 응원을 받으며 긴장을 풀 수 있었다”며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의 메트 데뷔 뒤에는 20년 전의 소중한 약속이 있었다. 2006년 유학 시절 전설적인 성악 코치 니코 카스텔로부터 “메트 무대에서 만나자”는 격려를 받았던 기억이다. 비록 카스텔은 2014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 약속은 김효나가 굴곡진 커리어를 버텨내게 한 이정표가 됐다.
김효나는 메트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성악가는 긴 호흡으로 버티는 맷집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남겼다. 단역부터 시작해 묵묵히 자신의 길 을 걸어온 그의 행보는, 화려한 조명보다 뜨거운 인내의 시간이 세계 무대에서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 증명하고 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