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업무상 정당한 전보 명령을 거부했다 하더라도, 회사가 즉각적인 시정 요구나 징계 절차 없이 방치하다가 가장 수위가 높은 처분인 해고를 한 것은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지시 거부 이후 면담 과정에서 관리자가 보인 유화적인 태도가 근로자에게 오해의 여지를 줬다면, 이후의 지시 불이행을 전적으로 근로자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취지다. 특히 직장 괴롭힘 피해자를 보호하는 법 조항이 정당한 인사권 행사의 거부에 면죄부를 주는 사례라 인사담당자들의 주의를 요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서 일할래"...발령 거부한 직원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 6-1행정부는 최근 A건설사가 중앙노동위원회위원장을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취소 소송에서 1심을 인용하고 회사 측의 청구를 기각하며 근로자의 손을 들어줬다.
2022년 A사는 회사에서 매니저로 근무하던 입사 3년차 B씨에게 서울 본사에서 천안 오피스텔 현장 공무 담당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전보명령을 내렸다. 직원 24명을 대상으로 한 일괄 인사발령이었다. 하지만 B씨만 이를 거부하고 본사로 계속 출근했다. 강남구에 살던 B씨는 "시공 현장 경험이 없는 자신을 현장에 투입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며 "본사 내 다른 부서 업무에 내가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전보 탓에 발생하는 생활상 불이익이 커 부당하다고도 주장했다. 법원은 전직·전보 처분은 원칙적으로 회사의 재량이지만, 업무상 필요성에 비해 근로자의 생활상 불이익이 지나친 경우에는 무효로 본다.
회사는 B씨와 면담을 거쳐 일단 본사 대기를 지시하고 다른 매니저를 천안으로 전보 발령했다. 하지만 곧 천안 현장에서 또 기술인력 충원을 요청하자 회사는 두 달 뒤인 5월 재차 B씨를 천안 현장으로 발령냈다. 그러나 B씨는 "발령 당일 휴가 중이라 즉시 출근이 어려운 상태였다"며 열흘 뒤 고용노동부에 '직장 내 괴롭힘' 신고까지 접수했다. 이에 따라 회사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한달간 유급휴가를 부여했다. 근로기준법은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유급휴가 명령 등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결국 회사는 2023년 6월 인사위원회를 열어 “인사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B씨를 해고했다. 이에 대해 B씨가 구제신청을 냈고 이후 중앙노동위가 B씨 손을 들어주자 A사가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한 것.
○법원 "인사발령 정당하지만...회사 후속 조치 미흡"
재판부는 우선 회사의 지방 발령이라는 인사권 행사 자체는 정당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건축공사업 특성상 남해, 울산, 제주 등 전국 각지에 현장이 존재하고 순환보직제를 기본 원칙으로 하고 있다"며 "근로계약서 작성 시 업무상 필요한 경우 장소 변경에도 동의했다"고 지적했다. B씨가 주장한 '생활상 불이익'에 대해서도 A사의 현장 중에 그나마 천안이 B씨의 거주지인 강남과 가까운 점을 들어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기는 했지만 아예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다"라며 전보 명령이 정당하다고 봤다.
하지만 최고 수위 징계인 '해고'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특히 재판부는 제1차 전보 명령 직후 관리자들이 B씨에게 '본사 대기'를 지시하거나, 면담 과정서 천안으로 출근하라는 지시 대신 "원하는 업무를 반영하겠다"는 등 모호한 태도를 보인 점에 주목했다. 특히 회사가 B씨에게 '대기명령'을 내린 부서장에게는 서면 경고만 하거나, 다른 매니저를 천안으로 보냈을 뿐 정작 B씨에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다 갑자기 해고한 점 등을 지적하며 "B씨로서는 전보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며 협상이 진행 중인 상태라고 믿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이후 '유급휴가'를 받고 출근하지 않은 기간에 대해선 "출근 의무 자체가 없으므로 해당 기간동안 전보를 거부한 것은 징계 양정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재판부는 결국 "첫 전보발령을 무시한 것은 단순히 B씨의 책임으로 보기 어렵고, 두번째 전보 발령을 거부한 기간도 법에 따른 휴가기간을 빼면 단기간에 불과해 해고는 사회통념상 현저하게 타당성을 잃었다"고 판단하고 근로자 측의 손을 들어줬다.
윤중환 법무법인 에스 변호사는 "인사 발령 후 근로자와 면담하는 과정에서 관리자가 '방안을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식의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방치할 경우, 자칫 근로자에게 '명령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지시 불이행이 발생하면 가급적 즉각적이고 명확한 시정 요구를 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조언했다.
곽용희/ 박시온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