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는 서둘러 고급 소파에 허름한 담요를 덮어 놓는다. 바삐 움직이는 그의 팔목 위로 신형 롤렉스 시계가 반짝인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테이블 위에 놓인 고급 접시들을 노려보고 있다. 한참을 탐색 후 마카롱과 케이크의 위치를 바꿔 놓는다. 곧 창문 너머로 차가 도착한다.
이란성 쌍둥이 스카이와 빌리는 어머니, 아버지의 오래된 아파트를 찾아간다. 지금은 모든 짐이 정리된 상태의 빈집. 그 집안에서 남매는 거실 바닥에 나란히 누워 하나둘씩 떠오르는 엄마, 아빠의 추억을 교환한다.
◇앤솔러지 형식 가족 이야기
놀랍게도 위의 이야기는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가 아니라 세 개의 분절된 이야기다. 미국 독립영화의 거장 짐 자무시의 신작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각기 다른 도시에 사는 각기 다른 가족의 에피소드가 담긴 ‘앤솔러지(anthology) 영화’다. 이 영화는 올해 9월 열린 제8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영화의 첫 번째 이야기 ‘파더’는 미국 동부 어딘가에 있는 한 숲속으로 향하는 남매 ‘제프’(애덤 드라이버 분)와 ‘에밀리’(마임 비아릭 분)의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방문하러 가는 중이며 그를 만나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다. 이윽고 재회한 남매와 아버지는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이어가지만, 아버지(톰 웨이츠 분)의 행동과 시선이 뭔가 석연치 않다. 제프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의 손목에 걸쳐진 롤렉스에 관해 묻자 아버지는 중국산 모조라며 말을 얼버무린다.
두 번째 이야기 ‘마더’는 영국의 한 저택에서 시작된다. 엄마는 일 년에 한 번 티 타임을 위해 집을 방문하는 두 딸 ‘팀’(케이트 블란쳇 분)과 ‘릴리스’(비키 크리프스 분)를 기다리고 있다. 고급 원피스와 식기를 갖춘 엄마와 달리 두 딸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소유자다. 셋이 마주 앉아 함께하는 ‘티 파티’ 역시 어색하고 피상적이기 그지없다.
마지막 에피소드 ‘시스터 브라더’는 파리의 한 골목을 운전 중인 남매 ‘스카이’(인디아 무어 분)와 ‘빌리’(루카 사바트 분)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신 엄마, 아빠의 아파트로 향하는 중간에 카페에 들른다. 에스프레소 두 잔을 두고 서로의 근황을 묻는 남매. 각기 다른 도시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이들이 농담처럼 부르는 ‘쌍둥이 요소(twin factor)’로 둘은 견고히 연결된 듯하다.
◇자무시 또 하나의 수작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자무시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분절의 미학’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세 개의 에피소드로 분리돼 있지만 각기 다른 이야기는 미묘하고 미세한 기시감으로 연결된다. 가령 파더 편에서 아들의 돈에 기생하는 철없는 아버지의 롤렉스는 두 번째 이야기 마더 편에서 별다른 직업 없이 허세로 살아가는 릴리스의 롤렉스로 재등장한다.가식과 인정욕구의 오브제로 등장한 롤렉스는 마지막 에피소드 시스터 브라더에서 다시금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아버지의 유품을 물려받은 빌리의 손목 위에서다. 앞의 이야기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세 편의 이야기에서 롤렉스는 각각의 인물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에게 모두 롤렉스는 ‘시계’가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전리품이다. 그것은 가질 수 없는 삶에 대한 환상이거나 그리움을 대신할 만한 아버지의 삶의 흔적이다.
자무시의 옴니버스 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평범하지만 비상하다. 그의 정성스러운 큐레이션으로 탄생한 배우군이 연기한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그들의 화려함과 독특함이 아닌, 극강의 평범함으로 빛난다. 나누는 대화, 들르는 장소, 서로에게 하는 행동 등은 지극히 보편적이면서도 범우주적인 일상이자 과거, 그리고 가족의 현재와 미래인 것이다. 자무시의 (이야기적) 분절은 그렇기에 당위적이고 아름답다. 단면으로 전체와 전부를 사유하는 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과연 자무시의 또 다른 수작으로 부족함이 없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