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롤업’ 나선 VC
30일 실리콘밸리 전문 매체 뉴커머에 따르면 유명 VC인 스라이브캐피털은 AI 롤업 전문 지주회사 스라이브홀딩스 산하에 실드테크놀로지파트너스를 설립하고 최고경영자(CEO)로 짐 사이더스 전 팰런티어 최고정보책임자(CIO)를 선임했다. 사이더스 CEO는 실리콘밸리 IT 인프라 운영에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이 회사의 목표는 스라이브캐피털 자금으로 IT 유지·보수 업체들을 인수하고 통합한 뒤 AI를 접목해 기업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단순한 AI 스타트업 지분 투자를 넘어 전통 서비스 기업을 사들이고 AI로 효율화해 추가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이다.또 다른 VC인 제너럴카탈리스트(GC)도 15억달러(약 2조원)의 자금을 투입해 10곳이 넘는 스타트업을 분야별로 창업하고 관련 서비스 기업을 줄줄이 사들이고 있다. 법률, IT, 부동산 등 AI로 업무의 30~70%를 자동화할 수 있는 10개 버티컬 영역을 선정했다. 마크 바가르바 GC 디렉터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기업을 롤업하고 AI로 자동화해 두 배 더 많은 고객을 받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과거 롤업 전략은 주로 사모펀드(PE)가 지역 인프라 기업이나 IT 서비스 업체를 인수하고 합칠 때 많이 활용됐다. 요즘 VC가 새롭게 구사하는 롤업은 키워드가 AI다. 전통 서비스에 AI를 적용해 플랫폼화하면 기업가치를 테크기업 수준의 멀티플(배수)로 받을 수 있다는 데 베팅한다. 전통적인 인력 기반 용역회사를 고마진 기술 기업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VC 분석 센터인 컨트래리리서치는 “저마진·노동집약 업종이 버티컬 AI 롤업엔 가장 이상적”이라며 “AI로 마진을 조금만 개선해도 롤업을 통해 확보한 규모 덕분에 수익성이 크게 뛴다”고 했다.
AI 기업과 연결해 고객 확보
과거 PE식 롤업이 비용 절감을 위해 재무 전문가를 활용했다면 VC의 AI 롤업은 기술 이식을 위해 기존에 투자한 AI 기업과 연결하거나 아예 엔지니어링 조직을 신설해 투입한다. 오픈AI에 초기 투자한 스라이브캐피털은 하비와 램프 등 기술 스타트업 베테랑으로 구성된 엔지니어팀을 스라이브홀딩스에 구축했다. 회계법인 등 AI 롤업용 기업을 인수하면 오픈AI 연구원과 스라이브홀딩스 엔지니어가 함께 배치된다. 브래드 라이트캡 오픈AI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스라이브홀딩스와의 제휴를 발표하며 “최첨단 AI 연구가 비즈니스 조직에 적용될 때 나오는 혁신을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AI 도입이 필요한 회사를 확보하면 프로젝트를 수주한 AI 스타트업은 대규모 고객 풀을 갖춘다. GC는 AI 엔지니어를 모아 AI 롤업용 기술 회사인 크레센도를 창업한 뒤 콜센터 운영 플랫폼 파트너히어로를 인수했다. 크레센도는 파트너히어로의 200개 고객사에 바로 AI를 적용할 수 있게 됐다. GC가 투자한 법률 플랫폼 유디아는 법률 전문가 300명을 갖춘 아일랜드 리걸테크 기업 존슨하나를 사들인 뒤 지난 10월 AI 네이티브 로펌 유디아카운셀을 설립했다.
벤처 롤업 전문가인 조너선 리에만 비프로스트 책임자는 “전통 회사를 사서 AI를 일률적으로 도입하는 게 한 계정씩 소프트웨어를 파는 것보다 더 싸고 빠르다”고 말했다.
PE와 제휴 전략도 펼쳐
AI 스타트업이 다른 스타트업을 사들여 버티컬 영역에서 시장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도 많아졌다. 크런치베이스에 따르면 올 상반기 투자받은 스타트업이 다른 스타트업을 인수한 거래는 427건으로 이 중 AI 관련이 262건에 달했다.스타트업의 인수 전략 뒤엔 VC의 지원이 있는 게 보통이다. 슬로벤처스는 스타트업이 롤업에 필요한 AI 기술을 갖출 수 있도록 시드투자를 하고 이들 스타트업이 인수합병(M&A)을 시도할 때 추가 자금을 투입한다. 비상장 기업을 사들이는 팀셰어스, 주차장을 인수해 AI 무인결제 시스템을 까는 메트로폴리스에 돈을 넣었다.
또 다른 VC인 라이트스피드는 아이작 킴과 아미시 데사이 등 스타 심사역을 앞세워 엔지니어링과 헬스케어 분야에서 롤업 플레이를 하고 있다. 라이트스피드가 AI 스타트업 지분의 절반 가까이를 취득하고 그 스타트업이 기업을 연쇄 인수하는 구조다. 미국 오스틴에 본사를 둔 8VC도 최근 스텔스 기업 시퀀스홀딩스에 시드투자를 했다. 시퀀스홀딩스는 다양한 기업을 인수해 AI로 개조하는 전략을 내세운 지주회사다.
VC가 기술 투자가 아니라 기업 인수에 집중한다는 데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사미르 카울 코슬라벤처스 파트너는 “AI 롤업은 PE 플레이북에 가까운 전략이어서 PE 스타일의 파트너와 함께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했다. 베세머벤처파트너스는 PE인 센터브리지가 주도하는 롤업 딜에 공동 투자자로 들어가 AI 도입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 국내 VC 심사역은 “플랫폼 수수료 모델은 끝났고 이젠 전통 산업에 들어가 직접 마진을 개선하는 ‘진흙탕 싸움’을 해야 돈을 벌 수 있다”며 “국내 VC도 기술 투자 후 가만히 지켜볼 게 아니라 이 기술로 어떤 산업을 바꿀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