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시한부 암 환자가 있다. 그에게 남은 삶은 3~6개월. 마지막으로 써볼 수 있는 치료제는 딱 하나 있다. 이 치료제를 쓰면 생존율은 3분의 1로 올라간다. 문제는 가격이다. 주사 한 방에 무려 5억원이다. 자, 선택해야 한다. 5억원을 들여 삶을 도모해볼 것인가.웬만한 사람이라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치료제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5억원은커녕 500만원조차 버거운 빈곤층일 경우 그 3분의 1의 생존 그룹에 들어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해 사망하고 나면 남은 가족은 빚을 갚느라 평생을 허덕여야 할지 모른다.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 환자 수백 명은 이 잔인한 선택지를 받아들여야 했다. 재발을 거듭해 더 이상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기대는 치료제가 5억원짜리 주사제 ‘킴리아’다.
그 환자와 가족이 가혹한 부담을 벗게 된 것은 2022년 이 치료제가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되면서다. 지금은 수백만원 선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 이 환자들은 그나마 행운이다. 여전히 우리나라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수억원, 수천만원의 약값을 내야 하는 희소 질환자가 수만 명이다. 알츠하이머 치료제 레카네맙이나 유전성 질환 치료제 웰리렉이 그렇다.
장면 2. 매년 이맘때쯤이면 전국 치과에 인파가 몰린다. 대부분이 ‘무료 스케일링’을 받기 위해서다. 정부는 만 19세 이상 국민에게 1년에 한 번 스케일링에 건강보험 혜택을 적용한다. 연말 치과 대기실은 그 혜택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스케일링 진료 항목인 ‘치주염 및 치주질환’으로 치과를 찾은 사람은 지난해 1950만 명이었으며 올해는 사상 처음 20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1인당 진료비는 약 12만원에 달한다. 이렇게 빠져나간 건강보험금이 연간 2조4000억원이다.
스케일링에 이어 건강보험금이 두 번째로 많이 빠져나간 사례는 기침, 고열 등 이른바 급성 기관지염이다. 환자들은 대부분 1~3주 안에 자연 호전된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혹시나 하는 심정에 의사를 만나고 처방받는다. 그렇게 지난해 1700만 명이 병원을 찾았다. 작년 한 해 이들 환자를 치료하는 데 1조2000억원의 보험금이 쓰였다.
장면1과 2는 우리 건강보험의 논쟁적인 대목을 보여주는 대표적 단면이다. 중증 질환에 걸린 소수 가입자가 혜택을 누리는 게 맞을까 아니면 경증질환에도 보장성을 확대해 다수 가입자가 혜택을 보게 해야 할까. 이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효율성을 따지면 다수 가입자가 혜택을 받는 게 맞다. 하지만 건강보험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전자여야 한다. 보험의 본질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 닥쳤을 때 돕는 것이다. 낸 만큼 혜택을 누리는 연금이 아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인들은 그 본질을 잊고 보장 범위를 넓혀왔다. ‘의료 개혁의 큰길을 가겠다’ ‘병원비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식의 구호에 맞춰 건강보험은 난도질당했다.
우리는 곧 그 대가를 치른다. 건강보험은 내년 대규모 적자로 돌아선다. 건강보험 곳간엔 준비금 약 30조원이 남아 있는데 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내년부터 연간 4조~5조원씩 까먹는 상황이 온다. 그리고 2033년께 준비금이 완전히 소진된다. 지금 이대로면 후세대는 월급의 20~30%를 건강보험으로 내야 한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탈모를 언급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대통령은 “탈모는 ‘생존 문제’”라며 건강보험을 통해 치료를 지원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국내 탈모인은 생각보다 많다. 초기 증상을 가진 사람까지 포함하면 약 1000만 명, 연간 탈모 처방약 규모는 2000억원 안팎에 이른다고 한다. 특정 성별과 특정 연령대의 문제만도 아니다. 여성, 청년 탈모 환자가 점점 늘고 있다. 이들의 심적 고통과 경제적 부담을 보듬는 정부의 노력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건강보험이 쓰여야 할 곳은 아니다. 건강보험은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감당하게 해야 한다. 멀리 찾아볼 필요도 없다. 지금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생사를 다투는 희소·난치성 질환자의 절박한 호소가 이어진다. 그 목소리를 더 들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