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복궁에서 청와대 방면으로 올라가면 북한산 아래에 있는 고급 주거 밀집 지역인 서울 종로구 평창동이 나온다. 평창동 한가운데에 있는 39-1번지는 현재 38세대 규모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불과 3년 전만 해도 신혼부부용 공동주택을 짓는 사업이 추진되던 자리였다. 신혼부부용 공동주택을 짓던 시행사 M사가 대주단과 내홍을 겪은 뒤 기한이익상실(EOD)이 발생해 공매로 넘어갔고, 결국 새 시행사가 105억 원에 낙찰받아 아파트를 완공했다.
이의제기에 보완수사 4회 거쳐서야 송치
이 평창동 부동산 개발 사업을 둘러싸고 시행사와 대주단이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증권사 임직원들이 146억 원 규모의 부동산 대출을 알선한 뒤 지인 업체를 통해 뒷돈을 챙긴 의혹이 확인됐다. 사건을 인지한 해당 증권사가 법률자문을 받아 즉시 경찰에 고소했지만 수사는 3년째 표류하고 있다. 경찰이 복잡한 자금 흐름과 고의 입증 한계로 인해 지능범죄 사건을 뒷전으로 미루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10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지난 9월 16일 H증권 전직 임직원 7명을 사금융알선죄 혐의로 서울 남부지방검찰청에 송치했다. 2022년 10월 H증권이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수사가 시작된 지 약 3년 만이다. 경찰이 사건을 검찰에 넘기기까지 3년간 H증권은 이의제기, 추가 고소를, 검찰은 보완수사를 네 차례나 지시해야 했다. 경찰은 이어 지난 10월 업무상배임 혐의로도 4명을 송치했다.
사건은 2022년 7월 시행사 M사가 H증권 전직 임직원과의 분쟁으로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제기하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H증권은 금감원의 사실관계 조회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재직 당시 146억원 규모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주선한 뒤 수수료를 별도의 영세 자산운용사로 빼돌려 지급받은 사실을 적발했다. H증권과 나눠야 할 주선 수수료를 독식하기 위한 행위였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이른바 ‘도시락 싸가기’ 수법으로 칭한다.
H증권은 법률 자문을 진행한 결과 형법상 업무상배임죄에 해당한다고 보고 이 3명을 같은 해 10월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형사 고소했다. 하지만 회사의 예상과 달리 경찰은 “해당 금전 거래가 개인적 이득으로 이어졌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피의자의 진술을 받아들여 불송치 결정을 거듭 내렸다. 이 당시 경찰은 임직원들이 실제로 수수료를 받았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못해 수사에 난항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능범죄 신속 처리 못하는 경찰
경찰이 사기·횡령, 사문서 위조 등 당사자 간 공방이 치열한 지능범죄를 신속히 처리하지 못해 수사가 지연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서범수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9월 기준 전체 지능범죄 사건 가운데 처리기간이 6개월을 초과한 비율은 21%로 집계됐다. 경찰 내부에서는 입건 후 6개월이 지나도록 종결되지 않은 사건은 장기 사건으로 분류한다. 지능범죄는 장기 사건 비율이 강력범죄(3.1%), 폭력범죄(1.4%), 절도범죄(1.3%)와 비교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지능범죄는 사기, 횡령, 배임, 문서 위조, 증수뢰 등 은폐·기술적 수단이 동원되는 범죄를 통칭한다.
보완수사 지시가 없더라도 금융 관련 수사가 1년 넘게 장기화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광진경찰서는 2023년 11월 검찰로부터 이송받은 M증권사 임원 출신 L씨에 대한 부동산 PF 사기 사건을 1년 뒤인 지난해 11월에야 검찰에 넘겼다. L씨는 2억1000만달러(약 3000억원) 규모의 대출계약서를 위조해 해외 거래처에 제출하고, 인천 구월동 주상복합 개발 과정에서 토지계약금을 빌려준 6~7명에게 허위 투자인수확약서(LOC)를 제시한 것으로 드러나 회사로부터 고발됐다.
류병화 기자 hwahw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