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를 충전기에 꽂아두기만 해도 차주가 돈을 버는 시대가 열린다. 충전된 배터리에 저장된 전력을 전력망으로 역전송해 판매하는 '양방향 충방전(V2G·Vehicle to Grid)' 기술이 본격적인 상용화 단계에 진입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전기차를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국가 전력 수급의 안정을 책임지는 '움직이는 에너지저장장치(ESS)'로 활용하겠다는 청사진을 마련했다.기후에너지환경부는 5일 서울 중구 호텔피제이에서 현대자동차, 한국전력, 충전기 제조사 및 학계 전문가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V2G 상용화 전략 추진 협의체’를 공식 출범하고, 관련 기술 표준화 및 제도 마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협의체 첫 회의에는 한국전력·전력거래소 등 전력 유관기관, 자동차·충전기·통신 분야 기업, 학계·연구기관 등 민관 전문가 30여 명이 참석했다.
V2G는 전기차가 주행하지 않고 주차된 상태일 때 배터리의 전력을 활용하는 개념이다. 전기차 소유주는 요금이 저렴한 심야 시간에 차량을 충전해 뒀다가, 전력 수요가 폭증해 요금이 비싼 낮 시간대에 전력망으로 전기를 되팔아 차익을 얻을 수 있다.
정부가 V2G 상용화에 속도를 내는 진짜 이유는 전력망 안정화다.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발전소를 짓지 않고도 예비 전력을 확보할 수 있는 효율적 대안이 될 수 있어서다.
통상 전기차 1대의 배터리 용량(약 70~100kWh)은 일반 가정집이 며칠간 쓸 수 있는 전력량과 맞먹는다. 수십만 대의 전기차가 전력망에 연결되어 동시에 전력을 공급한다면, 이는 거대한 '가상 발전소(VPP)'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부 관계자는 "전기차 50만 대가 5kW씩 방전한다고 가정하면 대형 화력발전소 1~2기에 맞먹는 1~2GW(기가와트)급 발전소의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며 "전력 피크 시 부하를 낮추는 '피크 쉐이빙'은 물론, 발전소 건설 비용을 수조 원 아끼는 것과 진배없다"고 설명했다.
V2G는 들쭉날쭉한 재생에너지의 출력 변동성을 제어하는 '댐' 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 태양광 발전량이 넘치는 낮 시간에는 전기차가 남는 전기를 흡수(충전)하고, 해가 져서 발전이 안 될 때는 전기를 내놓음(방전)으로써 전력망의 주파수와 전압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 테슬라도 뛰어들었다… 거스를 수 없는 글로벌 트렌드
전기차를 전력망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것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글로벌 흐름이 되고 있다. 그동안 배터리 수명 저하 등을 이유로 소극적이었던 글로벌 1위 전기차 업체 테슬라도 입장을 선회했다.테슬라는 당초 ‘가정용 ESS’ 보급 때문에 전기차를 ‘움직이는 ESS’로 활용하는 개념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2023년께 전력변환장치 원가가 싸지면서 현재 사이버트럭에는 가정에 전력을 보내는 파워쉐어(Powershare) 기능을 정식 탑재했다. 아직까진 사이버트럭만 가정용 비상 전원을 담당하는 개념이지만, 향후 모델3, 모델Y에도 V2G 기능을 탑재하고, 전력을 판매하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일론 머스크 CEO 역시 “모든 전기차가 전력망에 기여하는 미래가 올 것”이라며 에너지 기업으로서의 비전을 강조한 바 있다. 현대차·기아도 전용 플랫폼 E-GMP를 통한 기술 실증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부는 협의체를 통해 상용화를 가로막는 장벽을 허물 계획이다. 우선 2024년부터 보급해 온 '스마트 제어 완속 충전기' 인프라를 활용해 별도의 대규모 공사 없이 양방향 충전 환경을 구축하기로 했다.
해결해야할 과제도 많다. 잦은 충·방전때문에 배터리 성능이 저하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켜야 한다. 이를 위한 배터리 안전·수명 관리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는 분석이다. 정부 관계자는 “충전기 중 전기차 배터리 정보를 분석해 충방전을 제어하고, 통신기능도 갖춘 새로운 개념의 완속 충전기를 개발하는 게 핵심”이라며 “배터리 기술도 더 나아가야 할 부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소비자가 전기를 팔았을 때 적정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요금·정산 체계를 만드는 작업도 필수다. 개인이 전기를 판매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선 전기사업법도 개정해야 한다.
정부는 향후 제주 분산에너지 특구와 도심형 시범사업을 통해 V2G를 실증하고 구체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확정할 방침이다. 이호현 기후에너지부 제2차관은 이날 출범식에서 "전기차 보급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양방향 충방전은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보완하고 국가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는 핵심 수단이 될 것"이라며 "국민에게는 전기요금 절감과 추가 수익이라는 실질적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