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트럼프의 입’으로 불리는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중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13개의 한국 화장품 사진을 올렸다. ‘한국 스킨케어 추천 아이템들(South Korea skincare finds)’이라는 문구와 함께 업로드된 이 제품들은 레빗 대변인이 올리브영 경주황남점에서 직접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 미국 프로야구(MLB) 월드투어 서울시리즈를 위해 LA다저스 선수단이 방한했던 지난해 상반기. 선수단의 아내들이 한국 화장품을 구매한 쇼핑백을 하나씩 들고 찍은 단체사진이 화제를 모았다. 특히 LA다저스팀 소속 제임스 아웃맨의 아내 다샤 아웃맨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한국의 스킨케어는 최고다!(Korean skincare is the best!)’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최근 국내에서 일어난 굵직한 이벤트마다 등장했던 키워드가 있다. 바로 ‘K-뷰티 붐’이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과 LA다저스팀 선수단 아내들이 한국 화장품 쇼핑 인증샷을 올린 것은 상징적인 사례로 꼽힌다. 글로벌 시장에서 K-뷰티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과거 중국을 상대로 뷰티 르네상스를 열었던 국내 화장품 산업이 이제는 북미, 유럽, 일본을 중심으로 새로운 저변을 만들고 있다.

K-뷰티 2라운드, 더 큰 시장으로
2010년대까지만 해도 화장품 산업은 대중 수출 의존도가 높았다. 한한령이 터지기 직전이던 2016년, 한국 화장품 수출액의 중국 비중이 70%를 육박할 정도였다. 2000년대 들어 차곡차곡 쌓아 온 제품 기획력과 품질이 궤도에 오른 시기였다. 마침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은 한류 드라마가 아시아 지역을 열광시킨 영향도 컸다. 한국산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매하기 위해 명동을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한중 양국의 외교 갈등이 불거졌다. 중국 정부는 한국행 단체 관광을 금지하는 한한령을 내렸다. 중국 내에서 한국 콘텐츠, 소비재를 소비하려는 움직임이 둔화되기 시작했다. 중국 의존도가 높았던 한국 화장품 산업으로서는 큰 악재를 겪게 된 것이다. 국내 시장의 큰형이었던 아모레퍼시픽 영업이익이 2016년 1조800억 원에서 이듬해 7300억 원으로 주저앉았다. 여기에 코로나19까지 발생하며 전 세계 뷰티 시장 자체가 크게 위축되면서, K-뷰티의 성장길은 이대로 막히는 것처럼 보였다.
주춤하는 것처럼 비쳐졌던 화장품 산업은 오히려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중국 외 지역으로의 수출이 크게 증가하며 전에 없던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해 화장품 수출액은 101억7800만 달러(약 14조8900억 원)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올해도 비슷한 추세가 이어지면서 1~9월 화장품 수출액은 85억 달러를 기록했다. 3분기 누계 기준 사상 최대치다.
이가영 삼성증권 연구원은 “사실 많은 화장품 회사들은 일찍부터 중국 시장의 위험성을 깨닫고, 다른 해외 시장에 진출해 열심히 칼을 갈고 있었다”며 “예컨대 코스알엑스는 2015년부터 미국 수출을 시작했으며, 아모레퍼시픽은 2019년부터 미국 대형 화장품 유통 채널 세포라와 협력해 왔다. 클리오나 아이패밀리에스씨의 롬앤, 마녀공장처럼 일찍이 일본 시장에 집중한 경우도 있었으며, 2017년부터 아예 중국 사업을 접고 미국에 진출한 실리콘투도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 내부를 관심 있게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감지할 수 없었던 숨은 시도가 있었고, 그 덕분에 한국의 화장품 수출이 재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삼성증권에 따르면 한국은 해외 시장에서의 성장세에 힘입어 지난해 전 세계 화장품 수출국 2위에 올라섰다. 1위는 프랑스, 3위는 미국이다. 특히 미국을 대상으로 화장품을 수출하는 국가 중에서는 한국이 시장 점유율 22%로 1위를 차지했다.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은 단순히 ‘메이저 시장에서 성과를 냈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 세계 시장을 제패할 만한 단초가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합리적 가격에 압도적 품질
미국에서 K-뷰티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여러 가지가 꼽히지만, 그 모든 배경의 전제조건은 압도적인 제품력이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최상의 효과를 내는 것이 K-뷰티가 미국 시장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한국 화장품은 색조 강국인 미국에서 다소 등한시됐던 기초 화장품이라는 틈새 카테고리를 공략했다. 더욱이 코로나19가 불어닥치던 시점부터 화려한 색조 화장보다 피부 본연의 건강을 가꾸는 데 관심을 갖는 분위기가 짙어졌다. K-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연예인의 투명한 피부를 선망하는 MZ(밀레니얼+Z) 소비자도 늘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합리적인 가격의 기초 제품을 온라인을 통해 구매하려는 수요가 확대했다. 미국 내 중저가 브랜드에서 좋은 품질의 기초 제품을 선보이는 경우는 드물었고, 마침 아마존에 포진한 한국 기초 제품에 기회가 돌아갔다는 분석이다.

아마존이 평가하는 K-뷰티의 강점은 끊임 없는 제품 혁신과 다양한 원료다. 한국 화장품 브랜드들은 달팽이, 트러플, 쌀, 홍삼, 어성초, 꿀, 청귤 등 기존에 활용되지 않았던 다양한 원료를 적극적으로 제품 개발에 반영하고 있다. 시카 리들, 다기능 펩타이드, 초저분자 콜라겐 마스크 등 업계의 트렌드를 뒤바꾸는 새로운 유형의 제품을 선보이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피부에 자극이 덜한 ‘착한 성분’을 내세운다는 점도 한국산 기초 제품이 갖고 있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예컨대 국내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한 구다이글로벌의 조선미녀는 ‘맑은쌀’ 시리즈로 특유의 건강하고 전통적인 이미지를 소구했다.
형권훈 SK증권 연구원은 “소비자들이 스킨케어 제품을 선택할 때 과거에 비해 브랜드보다는 제품에 포함된 성분과 그 성분의 과학적인 효과성에 더 높은 중요도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도 한국 화장품의 해외 확장을 지탱하는 요인”이라며 “일반적으로 소비재 산업에서는 마케팅이나 오랜 역사로 형성된 브랜드 가치 또는 브랜드 충성도가 새로운 플레이어의 시장 진입을 막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소비자들이 과거에 비해 브랜드보다 성분을 중요시하는 최근 화장품 시장에서는 이러한 진입장벽이 약해지고, 한국 화장품과 같은 신규 시장 진입자에게 기회가 열린다”고 분석했다.

혁신적인 제조·유통 인프라
최신 트렌드에 맞춘 발빠른 신제품 출시도 강점이다. 통상적으로 대규모 화장품 기업들은 신제품 하나를 선보이려면 최소 2년의 시간이 걸린다. 반면 한국은 발빠른 기획력을 바탕으로 3개월이면 신제품을 선보일 수 있는 환경이다. 속도전에 능한 한국 특유의 DNA가 작용한 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막강한 제조 인프라의 힘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코스맥스와 한국콜마로 대표되는 국내 제조자개발생산(ODM) 기업들은 한국 화장품 브랜드가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해주는 근간이다. 대규모 자본을 가지지 않은 소규모 업체들도 막강한 기획력만 갖췄다면 이들 ODM 기업과의 협업 아래 얼마든지 성공적인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브랜드가 떠올린 트렌디한 제품 아이디어는 세계적인 ODM 기업의 품 안에서 품질 좋은 제품으로 발빠르게 이어진다.
화장품 제조 인프라뿐만 아니라 유통 인프라도 한국이 최강이다. 국내 시장을 넘어 해외에서 안정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실력 있는 화장품 무역 유통 업체의 역할이 컸다. 국내에서 그 역할을 주요하게 맡고 있는 업체로는 실리콘투가꼽힌다. 화장품 관련주 중에서도 실리콘투가 크게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이가영 연구원은 “내수 시장에 집중하는 다른 유통사들과 달리, 실리콘투, 예스아시아 등 수출 전문 유통사들은 끊임없이 돈 되는 해외 시장을 발굴하고, 공격적으로 진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자사 웹사이트를 통해 해외 소비자에게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로 판매를 하기도 하고, 현지의 온라인 유통 업체들에게 기업 간 거래(B2B)로 상품을 제공하기도 하면서 해외 소비자에게 닿는 새로운 경로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며 “실제로 최근 비중국 시장에서 크게 성장하고 있는 코스알엑스, 조선미녀, 아누아, 티르티르 등 인기 인디 브랜드들은 온라인 매출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이들 중 다수는 실리콘투 등 수출 전문 유통사와 거래를 시작하면서 매출이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리콘투는 브랜드사로부터 재고를 미리 매입해 재고 부담을 대신 짊어지기도 한다. 자금력이 부족한 인디 브랜드가 해외로 진출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는 셈이다. 실리콘투가 재고를 대신 매입해주기 시작한 덕에, 많은 인디 브랜드들이 갑작스럽게 늘어난 주문량을 10~20배까지도 소화할 수 있었다는 전언이다.
도약하는 인디 브랜드
강력한 인프라를 등에 업은 중소형 브랜드의 활약은 국내 화장품 산업의 전체 지형도를 바꿔 놓고 있다. 국내 화장품 산업의 강자인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의 올 3분기 영업이익은 1043억 원, 462억 원으로 양대 산맥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다. 신흥 강자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올해 ‘매출 1조 클럽’을 바라보는 에이피알의 3분기 영업이익은 961억 원으로 아모레퍼시픽을 바짝 뒤쫓고 있다. 같은 기간 미국 매출만 1505억 원으로 전년 대비 280% 성장했다. 달바글로벌(167억 원), 브이티(121억 원)의 영업이익 성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신규 브랜드가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은 화장품 산업의 마케팅·소비 문법이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오랜 세월 쌓은 브랜드의 위상보다는 SNS를 중심으로 바이럴이 되는 콘텐츠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이 최근 소비자들의 분위기다.
이승은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한때 외국인 인기 상위권을 독식했던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 LG생활건강의 후 등 전통 대형사 브랜드 대신, 최근에는 신흥 인디 브랜드들이 더 자주 거론되고 실제 구매로 이어지고 있다”며 “이들 브랜드는 가격 경쟁력보다는 뛰어난 제품 효능과 SNS 화제성을 무기로 MZ세대와 글로벌 소비자들을 끌어당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TV, 오프라인 광고 등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브랜드 캠페인보다는, SNS에 게시된 사진 한장, 뷰티 인플루언서의 후기 콘텐츠가 소비자의 구매로 이어지는 주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 연구원은 “K-뷰티 홍보 무대가 이제 거대한 옥외 광고판이 아니라 소비자 개개인의 인스타그램 피드가 된 셈”이라며 “기업들은 유명 인플루언서와 협업하거나,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공유할 수 있는 디지털 경험 요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틱톡 중심 SNS 마케팅
미국 시장에서의 SNS 마케팅 사례를 분석할 때 틱톡을 빼놓고 말하기는 어렵다. 틱톡은 K-뷰티가 미국 시장에서 폭발력을 가질 수 있었던 강력한 수단 중 하나다. 화장품 업계 마케터들 사이에서는 브랜드의 성장세를 점쳐볼 수 있을 만한 지표로 여전히 틱톡 트렌드를 활용한다. 퓨처 마케팅 인사이트에 따르면 ‘K-뷰티(kbeauty)’ 해시태그와 함께 업로드된 틱톡 콘텐츠는 지난해 기준으로 77만 개 이상을 기록했다.
최근 <K뷰티 트렌드>를 발간한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책에서 “K-뷰티의 성공을 이해하려면 틱톡을 이해해야 한다. 틱톡은 글로벌 뷰티 시장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플랫폼이다. K-뷰티가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데 미친 틱톡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라며 “여기서 짚고 가야 할 점은 한국의 유명한 틱톡커가 만든 콘텐츠를 미국 사람들이 본 것이 아니라, 미국 현지 인플루언서가 한국 제품을 노출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각 브랜드가 틱톡에서 활동하는 미국 인플루언서들에게 신제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시딩’을 하면, 이들이 ‘날것’의 표현을 담은 제품 사용 후기를 솔직하게 올린다. 콘텐츠가 성공적으로 확산될수록 제품의 판매량은 자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물론 K-팝, K-드라마 등 한국 문화의 인기가 후광으로 작용한 면도 있다. 형 연구원은 “서구권에서 소수가 즐기는 비주류 문화였던 한국 콘텐츠는 각종 영화와 드라마 등 콘텐츠가 글로벌 대흥행을 기록하면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인지도가 상승했다”며 “특정 문화에 대한 소비자들의 수용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브랜드나 제품을 접하는 데서 느끼는 심리적 거부감을 크게 줄인다. 해외 진출을 시도하는 한국 브랜드 입장에서는 해외 소비자들이 한국 제품을 소비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노력과 시간을 상당 부분 절약할 수 있다”고 했다.
독자적인 채널 파워를 갖추지 못한 인디 브랜드가 시장에서 존재감을 가질 수 있도록 ‘발견’해준 올리브영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신규 브랜드의 등용문 역할을 자처하는 올리브영은 기획부터 유통까지 브랜드사와 긴밀히 협업하며 K-뷰티의 붐을 이끌었다. 미국 아마존에서의 한국 화장품 순위는 올리브영에서 거뒀던 성적표의 영향을 적잖게 받는다. 국내 헬스앤뷰티(H&B) 업계의 유일한 플레이어로 자리 잡은 올리브영에 대한 업계의 평가는 나뉘지만, 최근 K-뷰티가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 데 올리브영의 지분은 적지 않다.
그렇다면 한국 화장품 산업의 성장세는 앞으로도 유효할까. 시장에서는 한국 화장품 기업들이 미국을 넘어 유럽, 중동과 같은 또 다른 시장을 넘보고 있는 만큼 장기적으로 성장을 유지할 것이란 분석을 내놓는다.
정지윤 NH투자증권 연구원은 “K-뷰티의 글로벌 확산은 속도의 문제일 뿐, 그간 한국 화장품 브랜드가 적극적으로 진출하지 않았던 브라질, 멕시코,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의 지역에서 한국 화장품 수입 비중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모습”이라며 “중남미는 K-컬처 선호도가 높고, 트렌드 수용력이 빠르다. 울타뷰티, 한국 유통 벤더사들도 멕시코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호주, 중동, 러시아의 K-뷰티 수요도 생각보다 커, 수출 볼륨이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초원 기자 ccw@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