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재생에너지, 수소, 소형모듈원전(SMR), 원자력발전 등 차세대 에너지 분야에서 다각적인 사업 협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의 첫 단독 면담에서 건넨 말이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SMR과 원전 등 에너지 분야로 범위를 넓혀 할아버지인 정주영 창업자가 50여 년 전 이룩한 ‘중동 신화’를 재현하겠다는 구상을 내비친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중동 전체 자동차 판매량(249만 대)의 3분의 1인 84만 대가 팔린 중동 최대 시장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빌리티를 넘어 미래 에너지 사업을 적극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첨단 산업으로 중동 신화 재현
현대차그룹은 정 회장이 27일(현지시간) 사우디 리야드 리츠칼튼호텔에서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났다고 28일 발표했다. 두 사람은 2022년 빈 살만 왕세자의 한국 방문 당시를 비롯해 두 차례 만난 적이 있지만, 단독 면담한 것은 처음이다.정 회장은 이 자리에서 사우디의 미래 비전 실현을 위한 협력 파트너로서 현대차그룹의 사업과 구상을 설명했다. 정 회장은 건설 중인 현대차 사우디아라비아 생산법인(HMMME)과 관련해 “사우디 산업과 고객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현지 맞춤형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데, 향후 시장 상황을 감안해 생산능력 확대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현대차의 중동 지역 첫 생산 거점인 HMMME는 내년 4분기부터 전기차를 포함해 연 5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한다. 자동차산업 기반이 없는 사정을 감안해 부품을 해외에서 조달해 조립·생산하는 반제품조립(CKD) 공장이다.
정 회장은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국가 발전 프로젝트 ‘비전 2030’에 대해선 “경쟁력 있는 사업 역량을 기반으로 참여하고 있다”며 “차세대 에너지 분야에서 다각적인 사업 협력을 기대한다”고 제안했다. SMR과 원전 시공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현대건설을 통해 수소·에너지 사업에서 ‘제2 중동 신화’를 쓰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정주영 창업자가 이끌던 현대건설은 1976년 당시 한국 정부 예산의 4분의 1에 달하는 사우디 주바일항만 공사(9억6000만달러)를 수주하며 중동 신화를 창조했다.
◇SUV·친환경차 맞춤 전략 공략
정 회장은 빈 살만 왕세자 면담에 앞서 26일 킹살만자동차산업단지에 있는 HMMME도 찾았다. 정 회장은 신공장 건설 현장에서 업무 보고를 받고, 현지 임직원들과 성장 전략에 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사우디 생산 거점 구축은 현대차가 중동에서 내딛는 새로운 도전의 발걸음”이라며 “고온, 사막 등 이전 거점들과 다른 환경에서 고객의 기대를 뛰어넘는 모빌리티를 적기에 공급할 수 있도록 모든 부문에서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현대차는 HMMME에 고온과 모래먼지에 대응하는 냉방 설비와 방진 체계를 갖추는 등 고품질 차량 생산 거점으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정 회장과 동행한 호세 무뇨스 현대차 최고경영자(CEO·사장)도 “HMMME는 중동 최대 자동차 시장인 사우디에 대한 현대차의 장기 비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라고 했다.
현대차그룹은 사우디에서 성장세를 이어가며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대차·기아의 현지 판매량은 2021년 12만2609대에서 지난해 19만9515대로 3년 새 62.7% 많아졌다. 현대차그룹은 현지 생산체제 구축에 발맞춰 현지 고객이 선호하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모델을 늘리고 전기차와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 하이브리드카 등을 출시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사우디 주요 기관·기업과 모빌리티, 스마트시티 등의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