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년 전만 해도 가스절연개폐장치(GIS)는 전력기기업계에서 ‘계륵’ 같은 존재였다. GIS는 차단기의 일종으로, 발전소나 변전소의 누전 또는 안전사고를 방지한다. 전력계통의 핵심 부품인 변압기에 비해 대당 단가가 낮고, 변전소 인근의 넓은 부지를 따로 확보해 설치해야 했다. 절연물로 활용되는 가스에 대한 각종 환경규제로 수출 조건마저 까다로웠다. 국내에서는 효성중공업 등 일부 업체만 GIS를 생산해 정부 사업에 납품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정통 강자’인 효성중공업뿐 아니라 HD현대일렉트릭, LS일렉트릭, 일진전기 등 국내 전력기기업체들이 일제히 GIS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새로운 키워드는 ‘친환경 GIS’. 전 세계적으로 탄소중립 기조가 강화되고 있는 데다 유럽연합(EU)이 GIS에 온실가스 일종인 육불화황(SF?) 가스 활용을 전면 금지하면서 친환경 모델로 전환하려는 수요가 급증했다.
업계에서는 2033년이면 친환경 GIS 시장이 약 10조 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전력기기업계가 변압기 슈퍼사이클에 이어 친환경 GIS를 미래 먹거리로 보고 설비 증설에 속도를 내는 이유다.


불붙은 친환경 GIS 수주 경쟁
HD현대일렉트릭은 10월 초 핀란드의 설계·조달·시공(EPC) 전문 기업과 145kV(킬로볼트)의 GIS 14대 공급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지난 5월 스웨덴에 이은 두 번째 유럽 수주다. 온실가스인 육불화황(SF?)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육불화황은 지구온난화지수가 이산화탄소의 2만3500배에 달하는 대표적 온실가스다.
초고압부터 중저압에 이르는 모든 GIS 포트폴리오를 확보해 친환경 수요에 대응한다는 것이 HD현대일렉트릭의 구상이다. 용량을 대폭 늘린 420kV급 친환경 GIS도 개발해 내년 상반기 인증 시험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더해 연말까지 충북 청주에 신규 배전기기 전용 공장을 완공하고, 연간 중저압 차단기 생산을 지금의 2배 수준인 약 1300만 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HD현대일렉트릭 관계자는 “차단기 부문의 매출과 수주 잔고가 증가하고 있다”며 “중동과 미국 등 기존 시장에서 고압차단기 사업을 안정적으로 이어가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친환경 GIS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효성중공업은 네덜란드 아른험 지역에 유럽 연구개발(R&D)센터를 설립하며 맞수를 놨다. 효성중공업의 첫 글로벌 연구 거점이다. 새롭게 들어선 연구소는 육불화황 가스 규제가 본격화하는 유럽 시장에 대응해 친환경 GIS 개발에 집중한다. 효성중공업 관계자는 “네덜란드 아른험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설비 시험 인증 기관인 KEMA가 있어 제품 시험 데이터를 빠르게 검증할 수 있다”며 “향후 초고압직류송전(HVDC)까지 연구 영역을 확대해 친환경 전력 기술 및 토털 그리드 솔루션까지 구현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효성중공업은 플루오로니트릴(C4-FN) 혼합가스를 적용한 ‘친환경 GIS 개발 로드맵’을 발표했다. C4-FN 혼합가스는 육불화황 가스와 비슷한 성능을 유지하면서도 온실가스 영향을 약 98% 줄일 수 있는 차세대 절연 가스다. 효성중공업은 현재 72.5kV, 170kV급에 적용한 이 기술을 245kV 이상 특고압 모델에도 사용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경남 창원에 1000억 원을 들여 전용 공장을 신설하고, 인도 푸네 현지 공장에 생산라인 증설을 추진한다.
170kV의 친환경 GIS를 2020년 국내 최초로 개발한 LS일렉트릭은 본격적인 해외 수주를 준비하고 있다. LS일렉트릭은 2016년부터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과 기술 협력을 통해 육불화황 가스를 대체할 ‘G3’ 가스를 적용한 친환경 GIS 개발을 추진해왔다. G3 가스는 이산화탄소와 산소 등의 혼합 가스로, 지구온난화지수를 육불화황 가스 대비 99% 이상 낮출 수 있다. 사용한 G3 가스를 회수해 재사용할 수 있는 기술도 2023년 개발을 마쳤다.
LS일렉트릭은 이를 통해 2022년 한국전력공사가 발주한 첫 번째 친환경 GIS 입찰에서 사업자로 최종 선정됐다. 충북 음성 천연가스 스위치야드에 170kV급 친환경 GIS 10여 기를 공급하는 계약으로, 지난해 상업 가동에 들어갔다. LS일렉트릭 관계자는 “한국전력이 2025년부터 모든 신설 변전소에 친환경 GIS를 도입할 계획을 밝힌 가운데 국내 첫 수주 레코드(기록)를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진전기는 2018년 독일 지멘스와 손잡고 친환경 GIS 공동개발에 착수했다. 다른 회사들처럼 육불화황을 대체하는 가스를 활용하는 대신, 일진전기는 가스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절연 매질로 건조공기를 사용하고, 진공차단기 기술로 전류를 차단하는 방식이다. 현재 170kV급, 72.5kV급 친환경 GIS를 갖추고 해외 수주를 넘보고 있다.

‘계륵’에서 ‘미래 먹거리’로
GIS는 차단기의 일종이다. 가정용으로 ‘두꺼비집’이 있다면, 변전소나 변압기에는 GIS가 누전을 막는다. 지난 50여 년간 설치된 GIS는 핵심 절연물로 육불화황 가스를 활용했지만, 일단 공기 중에 배출되면 200년 이상 남아 지구온난화를 유발하는 점이 문제시됐다. 업계 관계자는 “GIS는 대당 50억~100억 원인 초고압변압기에 비해 판매 단가(10억 원)가 낮고 환경규제도 까다로워 그동안 연구개발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설명했다.
주요 전력기기업체들이 각자 다른 분야에 특화하도록 유도한 1980년대 정부의 산업합리화 기조도 GIS 기술의 개발을 늦췄다. 정부는 고도성장을 위해 주요 업체에 서로 다른 일감을 몰아줬다. HD현대일렉트릭은 변압기, 효성중공업은 차단기, LS일렉트릭은 배전망 등에 초기 투자 역량을 집중하게 된 이유다. 이 중 GIS가 속한 차단기의 경우 현재 국내 설치 물량의 70% 이상을 효성중공업이 확보하고 있다.
2010년대 후반 글로벌 전력기기 시장이 슈퍼사이클에 오르면서 업체 간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노후화 변압기 교체 수요가 늘면서 국내 전력기기 회사들이 ‘초고압 변압기’ 수주전에 뛰어든 것이다. 인공지능(AI) 산업 발전으로 글로벌 전력 수요가 급증한 것도 송배전망 전반의 신설 수요를 부채질했다.
한때 계륵처럼 여기던 GIS에 대한 대접이 달라진 것도 이때부터다. 향후 3~5년 치 변압기 일감을 따낸 업체들은 차단기로 눈을 돌리고 있다. 기존 변압기가 초고압 모델로 교체되면 차단기 역시 초고압용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 시장조사기관 비즈니스 리서치 인사이트는 글로벌 친환경 GIS 시장 규모가 지난해 54억 달러에서 2033년 74억 달러(약 10조 원)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최근 EU가 친환경 규제를 대폭 강화하자, 친환경 GIS가 주목받고 있다. EU는 2031년부터 GIS에 육불화황 가스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노후 제품의 친환경 모델 전환을 유도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차단기 기술 개발이 초급 단계였던 과거에는 육불화황을 대체할 가스 개발이 어려웠다면, 요즘은 각 사가 플루오로니트릴(C4-FN) , 이산화탄소 혼합가스 등 대체재를 찾은 상태”라며 “중저압부터 초고압까지 친환경 기술 개발을 끝내고 고객사의 요구에 따라 공급할 역량을 갖췄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친환경 GIS 수주에 성공한 회사가 드문 것도 국내 업계에서는 기회로 보고 있다. 글로벌 기업 중 친환경 GIS 수주 이력을 갖춘 곳은 독일의 지멘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등 일부 선도 기업 정도다. 국내에서는 HD현대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일진전기 등이 수주 기록을 확보했다.
안시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