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19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회동이 끝나자마자 전용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한번 미국에 나가면 이곳저곳 돌며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신사업을 찾았던 평소 출장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5주기(10월 25일)를 맞아 추모 음악회(20일)와 추도식(24일) 등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 선대회장 추모는 삼성그룹 행사로만 그치지 않는다. 문화 공헌과 의료 기부로 대표되는 이른바 ‘KH(이 선대회장의 영문 이니셜) 유산’을 재조명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행사다. 이 선대회장의 대표 경영철학인 ‘인재경영’을 계승·발전시켜 삼성이 어떤 상황에서도 경쟁력을 잃지 않도록 돕는 버팀목 역할도 한다.
◇인재경영에 JY 색깔 입힌다
삼성은 20일 경기 용인 삼성전자 인재개발원 콘서트홀에서 ‘이건희 선대회장 5주기 추모 음악회’를 열었다. 오후 6시45분 시작한 음악회는 약 2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1부 공연은 삼성문화재단의 악기 후원 프로그램 지원을 받고 있는 첼리스트 한재민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맡았다. 2부엔 유명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이끄는 로스앤젤레스필하모닉이 공연했다. 행사엔 이 회장과 모친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등을 비롯해 사장단, 관계사 우수 직원 등 900여 명이 참석했다.이날 오전 3시에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이 회장은 오후 2시께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삼성생명 우수 보험 설계사, 신임 상무 부부들과 3시간 가까이 개별 사진 촬영을 했고, 이후엔 신임 부사장 부부들과 만찬을 함께했다.
이 회장은 창업·선대회장의 인재 중시 경영 기조를 계승·발전시켜 자신만의 인사 철학을 만들어 가고 있다. 지난 3월엔 삼성 계열사 임원 2000여 명에게 ‘삼성다움’ 교육을 시행하고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이란 문구가 새겨진 크리스털 패를 전달했다. 최근 들어선 미국 실리콘밸리식 주식 보상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지난 14일 향후 3년간 주가 상승폭에 따라 직원에게 최대 1억원 상당 자사주를 지급하는 ‘성과 기반 주식 보상(PSU)’ 제도를 시행한 게 본보기다. 올 8월엔 임원들에게 장기성과인센티브(LTI)를 주식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3조원 미술품 기부로 韓 미술 성장
이 선대회장 5주기를 맞아 KH 유산도 재조명받고 있다. 이 회장과 유족들은 고인의 사회 공헌 유지를 기려 2021년 예술품 기부를 결정했다.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선대회장 재산의 상당 부분을 매각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고인의 유산 중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불리는 2만3000점의 유산은 3조원이 넘는 가치로 추정된다. 문화계 관계자는 “기업가의 선한 영향력의 본보기”라고 했다.이 선대회장의 기부는 예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고 한국 미술 시장과 작가들의 성장을 촉진한 계기가 됐다. 이건희 컬렉션은 전국 주요 전시관에서 순회전을 진행해 총 35회에 걸쳐 350만 명의 관람객을 끌어모았다. 국내 역대 미술 전시회 중 최고 기록이다.
이건희 컬렉션은 다음달부터 해외로 간다. 미국 워싱턴DC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을 시작으로 시카고 미술관,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서 특별전이 2027년 1월까지 열린다. 국내 미술계에선 거장으로 불렸지만, 해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도 재조명될 것으로 전망된다.
의료 기부도 빼놓을 수 없는 KH 유산으로 꼽힌다. 이 선대회장은 생전에 “모든 어린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보살피는 일은 우리의 사명”이라며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진행했다. 유족들은 고인의 유지를 이어 소아암·희소질환 환아의 치료와 선진 의료지원 체계 구축을 위해 3000억원을 기부했다. 현재까지 환아 2만2000여 명이 도움을 받았다. 삼성 총수 일가는 감염병 극복 지원 사업을 위해서도 7000억원을 기부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