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원인이 와도 공무원들이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서울 동대문구의 한 행정복지센터 공무원인 김모씨(35)는 29일 밀려드는 민원인을 상대하느라 화장실 갈 새도 없이 분주했다. 김씨를 포함한 공무원들은 정부24 시스템 복구 지연으로 노동·복지·보훈 분야 등 서비스 이용이 어렵다는 안내를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했다.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정부 주요 전산망이 마비된 뒤 첫 평일인 이날 지방자치단체 행정복지센터와 은행 지점 등 현장에서는 서비스 불통으로 민원이 폭주하는 등 곳곳에서 혼란이 빚어졌다. 행정안전부 등 주요 부처는 복구 작업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현장에선 마치 1970년대로 되돌아간 듯한 행정 처리가 이뤄졌다.
◇대학 수시원서 접수 코앞인데…

이날 서울 원지동 서울추모공원 화장터에서는 많은 유가족이 화장장 예약을 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이번 화재로 e하늘장사정보 시스템 예약 사이트가 먹통이 됐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화장장을 이용하지 못하면서 상주들이 불편을 겪었다. 상조회사 팀장 김모씨는 “사망진단서, 화장장 이용신청서 등을 팩스로 받는 등 아날로그식 일 처리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족을 떠나보낸 한 남성은 “장례지도사 말로 전화를 한 200번 했다고 하더라”라며 “국가 중요 시스템이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일선 학교도 비상이 걸렸다. 전문대 수시원서 접수 기간이 맞물려 수험생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학교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경기 용인시의 한 고교 교사 박모씨(41)는 “전문대 수시원서 접수가 내일까지”라며 “‘한부모가정 증명’ 등을 위해선 가족관계증명서를 추가 제출해야 하는데 수험생 일부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사설 메신저 쓰고 수기로 공문 작성
행안부는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언론 브리핑을 열고 이번 화재로 전소된 주요 정보시스템 96개 목록을 공개했다. 1등급인 통합보훈(국가보훈부), 국민신문고(권익위원회), 국가법령정보센터(법제처), 안전디딤돌(행안부)과 노사누리(고용노동부), 대테러센터 홈페이지(국무조정실), 범정부 데이터분석 시스템(행안부), 정책브리핑(문화체육관광부) 등이 포함됐다.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 본원 복구와 관련해 정부는 공무원과 사업단 인력을 총동원해 현장에 투입하고 있다. 화재 영향이 작은 1~6층 전산실은 차례로 재가동하고 있고, 5층 전산실은 분진 청소 후 전문업체 작업을 거쳐 1~2주 내 재가동할 계획이다.
정부는 이번 화재로 전소 피해를 본 96개 전산시스템을 대구 민관협력 클라우드센터로 옮겨 복구하기로 했다. 자원 준비에 2주, 시스템 구축에 2주 등 4주가 걸릴 것으로 예상되지만 입주 기업 협조를 통해 기간 단축도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이날 오후 10시 기준 행안부 소관 시스템 23개가 복구됐다. 모바일신분증(발급 제외), 공공서비스통합관리 시스템, 주민등록 시스템, 문서유통 시스템, 행정전자서명인증센터 등이 포함됐다. 정부 업무 포털인 온나라시스템 등 내부 업무망은 여전히 정상화되지 않았다. 이에 행안부는 업무연속성계획(BCP)에 따라 공무원들에게 연계 시스템이나 공직메일 등을 활용하라는 업무 매뉴얼을 배포했다.
온나라시스템 등 공무원 내부망이 마비되면서 현장에선 펜을 들고 하나씩 문서 대장을 작성하는 한편 외부 사설 메신저를 활용해 임시방편으로 업무를 보는 실정이다. 산업통상자원부 등은 이날 하루 예산 집행, 대외 협의 문서 등을 종이로 작성해 보관했다. 행안부 공무원 한모씨(35)는 “내부 이메일과 채팅 기능이 먹통이라 카카오톡을 깔고 소통하고 있다”며 “업무 노트북에 사설 메신저를 설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경찰청 형사사법포털(KICS)에 장애가 생기며 우편을 이용한 수사 진행상황 통지도 막혔다. 경찰청은 수사관이 우체국을 방문해 수사 진행상황 통지서를 부치거나 전화로 고소인 등에게 안내할 수 있도록 했다. 경찰 헬기항공업무시스템에도 장애가 발생해 헬기 장비현황 등을 수기로 관리해야 한다.
◇오프라인 창구·대체 사이트 가동
정부는 당분간 장애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오프라인 창구와 대체 사이트를 가동 중이다. 김민재 행안부 차관은 “국민신문고, 통합보훈 등 민원은 방문·우편 접수로 처리하고 국가법령정보센터는 국회 입법정보 등 대체 사이트를 안내하고 있다”며 “재산세 등 각종 납부 기한을 연장하고 오프라인 발급 수수료도 전면 면제했다”고 설명했다.정부 시스템 이중화 대책이 미흡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대해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은 “이중화 방식은 액티브-액티브, 액티브-스탠바이 등 여러 단계가 있고 정부 시스템 특성상 복잡한 연계와 막대한 예산이 요구된다”며 “연구용역을 거쳐 단계적 추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해명했다.
김다빈/김유진/권용훈 기자 davinci@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