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 수낵 전 영국 총리가 지난 5월 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을 때 정치·외교 분야보다 더 주목받은 것은 K뷰티 관련 발언이었다. “한국에 온다고 하니 10대 딸들이 올리브영에 꼭 들러야 한다며 화장품 구매 목록을 적어줬다.”K뷰티의 인기는 영국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유럽 미국 일본 남미 중동 등 전 세계적 열풍이다. 수출도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화장품 수출은 102억달러로 5년 전과 비교해 56% 늘었다. 독일(91억달러)을 제치고 프랑스(233억달러), 미국(112억달러)에 이어 세계 화장품 수출국 3위에 올랐다. 세계 3위 화장품 시장인 일본에서는 3년 연속 수입국 1위를 차지했으며, 미국 시장에선 프랑스를 제치고 최대 수입국으로 떠올랐다. 전세계 기준으론 올해나 내년 미국을 제치고 2위 수출국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2010년대 중국 수출이 대폭 늘어나며 성장한 게 K뷰티산업의 1차 도약이라면, 2020년대엔 세계로 무대를 확장하는 2차 도약이다. 1차 도약은 1940년대 설립된 전통 강자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이 이끌었다. 이번엔 1990년대 세워진 파마리서치와 2000년대 들어 생겨난 에이피알, 달바글로벌, 구다이글로벌, 클래시스, 휴젤 등 신흥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화장품에 피부미용 제품과 기기를 수출품 리스트에 추가한 게 큰 차이다.
증권시장에서는 이 같은 판도 변화가 더 극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신흥 강자들이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의 수십 년 아성을 무너뜨렸다. 지난 6월엔 LG생활건강이 빅2에서 밀려났고, 이달 들어선 아모레퍼시픽이 대장주에서 물러났다. 8월 11일 현재 뷰티업종 시가총액은 에이피알(8조6000억원), 아모레퍼시픽(7조4000억원), 파마리서치(7조원), LG생활건강(4조6000억원) 순이다.
K뷰티산업의 비약적 성장 비결로는 몇 가지가 꼽힌다. 먼저 정부의 직접 지원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한성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인정한 대목이다. 정부는 2000년 화장품 제조업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고, 2012년 지정하는 원료만 금지하고 나머지는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로 바꾼 게 전부다. 그러나 이게 컸다. 정부의 규제 완화와 무관심이 기업의 창의성을 극대화했다.
K뷰티 신흥 강자들은 기존 빅2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중국 시장에 목매지 않는 전략을 택했다. 반짝 수출이 늘어도 언제 혐한으로 바뀔지 모르는 곳이어서다. 대신 미국 유럽 일본 등 중국을 제외한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 무기는 K컬처다. K팝 아이돌 등 K컬처 스타를 모델로 기용하고 SNS를 활용해 대대적인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물론 뛰어난 가성비는 기본이다.
K뷰티가 국내 다른 산업이나 외국과 차별화되는 핵심은 생태계에 있다. 한국엔 제품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수많은 브랜드 기업, 올리브영 실리콘투처럼 유통만 담당하는 기업, 코스맥스 한국콜마처럼 제조만 전담하는 기업이 존재한다. K뷰티 생태계를 받치는 것은 파운드리(수탁생산) 기업이다. 수탁 제조만 하지 않고 개발까지 함께 한다. 인디 브랜드가 계속 생겨나고 히트할 수 있는 토대다.
대만에 TSMC가 있어 다른 반도체 기업이 생겨나고 성장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세계 톱3 뷰티 파운드리 중 2개가 한국에 있다. 한국엔 심지어 화장품 용기만 전문으로 만들어주는 회사까지 있다. 2500곳에 이르는 피부과와 성형외과 병원까지 포함하면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태계다. 도널드 트럼프의 표현을 일부 빌리자면 ‘크고 아름다운’ 생태계가 아닐 수 없다. 이 생태계를 바탕으로 K뷰티산업이 세계 최강으로 떠오르길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