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레 안무가 유회웅(41)의 영감은 일상에서 온다. 판타지보다 현실에서 흥미로운 상상을 펼쳐낸다. 유회웅은 드라마와 영화 대신 뉴스를 즐겨 보며 정보의 조각을 몸의 언어로 재창조해내는 일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스타 발레리노가 속속 등장하고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 소식을 알려오는 지금 한국 발레계가 가장 목말라 있는 건 ‘창작’ 영역이다. 국립발레단 무용수를 거쳐 ‘팔리아치’(2009)를 시작으로 독자적 안무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유회웅의 존재는 그래서 특별하다. 그가 만든 춤은 일상에서 영감을 받아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언어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무대 위 발레리나에게 가려진 발레리노 삶을 조명해 수년간 박수를 받은 ‘라이프 오브 발레리노’가 그의 대표작이다. 다음달 그는 서울시발레단을 통해 ‘노 모어(NO MORE)’를 선보인다. 작품은 8월 22~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지난해 유회웅은 서울시발레단 창단 사전 공연작으로 이 작품을 올렸다. ‘노 모어’는 1년간 숙성 시간을 거쳐 더 새롭게 태어날 예정이다. 최근 노들섬 서울시발레단 공간에서 연습을 진두지휘 중인 그를 만났다.

‘노 모어’는 현대사회의 피로감과 무기력함을 춤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드럼 비트를 음악으로 쓰는데요. 지하철을 타러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박자가 딱 맞더라고요. 무미건조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소리로, 춤으로 보여주는 데 적합했습니다.” 무기력한 반복의 움직임은 곧 폭발적인 에너지로 전환되며 관객을 일깨운다. “꿈과 현실의 교차에서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자’는 의지로 전환되는 장면이 무용으로 펼쳐지는 거예요. 지난해 초연에서는 무기력이 지배적이었다면 올해는 삶은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좀 더 강조했어요. 마지막 장면은 한 무용수가 벽을 뚫고 나가면서 마무리되는데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노 모어’를 다시 무대에 올리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 자신이 지난 1년 동안 힘든 일을 겪기도 했고, 힘들다는 말만 반복하면 더 힘들어진다는 걸 몸소 경험했어요. 우리 사회가 마냥 힘들어진 데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힘들면 더 힘내라’ 같은.”
이 작품에선 발레리노가 발레리나의 포인트 슈즈를 신고 무대에 서기도 한다. 유회웅은 현실이 아닌 꿈을 보여줄 때 이 신이 꼭 필요했다고 했다. “편견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한 선택이었어요. 남자가 신으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나요? 위화감 없이 포인트 슈즈를 신고 발레리나들과 군무를 추는 발레리노가 춤을 추고 나서 정말 좋았대요. 나를 가뒀던 것에서 벗어난 것 같은 느낌 아니었을까요. ”
유회웅은 무용수 시절부터 남다른 호기심으로 창작에 갈증을 느꼈다. 대학 시절에도 꾸준히 창작 활동을 하며 “어떻게 하면 돋보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곧 자신의 작품을 향한 대중의 관심과 그 속에서 느끼는 쾌감에 매료됐다. 무용수를 거쳐 안무가 길을 걸으며 유회웅은 ‘똥방이와 리나’를 비롯한 어린이 발레극, ‘누가 그에게 총을 겨누었나’ 같은 추리 무용극 등 다양한 장르에 끊임없이 도전했다.
“춤을 향한 열정으로 무대에 서는 걸 사랑했지만 창작이 정말 재밌었어요. 창작 과정에서도 정형화된 움직임보다 동시대 얘기를 하는 컨템퍼러리 작품을 만드는 게 더 잘 맞았고요. 작품은 공연이 끝나면 사라질지언정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진짜 나’를 발견하게 돼 정말 행복하지요.” 안무를 짤 때 무용수와의 충분한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도 했다. “무용수 색깔을 찾아주는 건 저의 장점인 동시에 일관성 있는 레퍼토리를 만들기 어려운 단점이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무용수를 계속 설득하고 이야기해주는 과정을 즐깁니다.”

유회웅의 예술 언어는 대부분 현실에 기반한다. “판타지보다 현실 속에서 흥미로운 상상을 펼치고 일상에서 영감을 얻어요. 드라마나 영화는 보지 않아요. 그 대신 뉴스를 많이 시청하면서 사회 현상을 깊이 고민하는 편이에요. 현대 가족의 문제, 미생 같은 직장인의 삶, 온라인상 마녀사냥 뉴스를 보고 있으면 창작 욕구가 솟아나요.” 클래식 발레에서 다루기 어려울 법한 주제에 관심이 많은 그는 그 주제들을 자신의 춤에 과감히 차용한다. 그는 무경계 탈장르 안무가이기도 하다. 성악가, 가야금 연주자 등 다양한 예술가와 협업한 경험도 있다.
그는 어린이 발레극을 통해 발레의 대중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다. ‘똥방이와 리나’에서는 아이들의 식습관 개선까지 연결시키는 참신한 시도를 했다. 하지만 창작물이 지속적으로 공연되기 어려운 현실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예술가가 안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제도적 지원과 ‘꿈의 무용단’ 같은 상주 공연 시스템이 필요해요. 무용수들이 돈 걱정 없이 작품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과거에는 ‘열정 페이’로 몰아붙이는 게 가능했지만 시대가 달라졌어요. 좋은 기획자가 드문 것도 창작자에게는 고통이죠. (티켓 가격부터 대관까지) 신경 쓸 게 너무 많거든요.”(웃음)
유회웅이 주목하고 싶은 다음 주제는 번아웃이다. “너무 많은 것이 머릿속에 들어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 몰라 2년 동안 헤맸다”고 고백했다. 또 그는 순발력 있게 작품을 만드는 데 능숙하지만 깊이감이 사라졌다는 고민에 빠져 있다고 했다. 지금은 비워내고 다시 하나씩 쌓아가는 ‘백 투 더 베이식’(Back to the Basic)의 시간이 절실하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는 오래 간직해온 꿈을 얘기했다. “언젠가 전막 컨템퍼러리 발레를 만들고 싶어요. 제목은 ‘척’이 될 거 같아요. 힘든 척, 괜찮은 척, 잘하는 척…. 뭐든지 ‘척’하는 현대인의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지 질문하는 그런 작품을요.”
유회웅은 안무 창작가이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경희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이기도 하다. 제자에게 냉철한 현실 인식과 끊임없는 열정을 강조하는 엄한 선생님이다. “제 자신이 춤에 대한 갈구가 컸고 노력에 비해 기회를 얻지 못한 경험이 있어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예술은 만만한 게 아니다. 나태한 마인드로는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죠.” 누구나 열심히 하니까 ‘잘해야 한다’는 평범한 말은 결코 가볍지 않게 다가왔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