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모난 침대, 네모난 창문, 네모난 테이블, 네모난 조간신문….’ 노래 ‘네모의 꿈’ 가사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사물은 네모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만큼 네모는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도형이다. 미술사를 수놓은 수많은 추상미술가가 작품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 네모를 선택한 까닭이다.
서울 한남동 리만머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네모’는 이처럼 사각형 모양을 이용해 작품을 그린 추상화가 네 명의 작품을 모은 기획전이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윤형근(1928~2007)과 정상화(93), 미국 출신 세계적인 추상미술 작가 맥아서 비니언(79)과 스탠리 휘트니(79)가 주인공이다. 전시를 기획한 엄태근 큐레이터는 “라틴어 ‘nemo’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며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인 네모를 통해 각자의 감정과 정체성을 작품에 표현한 대가들을 소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비니언과 정상화가 그린 네모에는 노동에 가까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니언은 미시시피주 목화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다. 자신의 유년기 사진과 출생증명서, 그 시절의 전화번호부 등 개인적인 문서를 붙인 뒤 그 위에 오일 스틱을 여러 번 꾹꾹 눌러 그림을 그린다. 정상화는 캔버스를 고령토로 덮고 여기에 일정한 균열을 낸 뒤 그 틈을 물감으로 채워 나간다. 손과 몸을 쓰는 반복적 과정은 거의 육체노동에 가깝다. 이런 과정을 통해 두 작가는 시간과 인내, 자신이 살아온 삶을 캔버스의 네모 속에 녹여낸다.
반면 휘트니와 윤형근의 작품은 똑같은 네모 모양이 서로 얼마나 다른 느낌을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강렬한 색이 돋보이는 휘트니의 네모는 격자 형태로 정돈돼 있으면서 재즈의 리듬 같은 경쾌함과 즉흥성을 품고 있다. 노랑, 주황, 분홍 등 선명한 색조가 충돌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무제’(2020~2021)가 단적인 예다.
윤형근의 작품은 묵직하다. 동양화법에 뿌리를 둔 그의 대표 연작 ‘청다색’(1978)은 단순해 보이지만 삶과 죽음, 하늘과 땅, 존재와 부재 등 철학적인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가다. 미국 미니멀리즘의 대표 작가인 도널드 저드(1928~1994)가 생전 윤형근의 작품에 반해 함께 전시하자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엄 큐레이터는 “추상화가 단순한 그림을 넘어 감정, 기억, 사회, 정체성을 꿰뚫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8월 9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