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6월 13일 15:22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주단이 제기한 책임준공 관련 소송에서 연이어 '원리금 전액 배상' 판결을 받아든 신탁업계의 재무 건전성에 비상등이 켜졌다. 쟁점이 비슷한 다른 소송에서도 신탁사가 패소할 우려가 커진 만큼 막대한 배상액을 회계에 선반영해야 할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건설경기 침체로 시공사들의 책임준공 의무를 떠안느라 이미 재무 상황이 크게 악화된 신탁업계의 경영난이 한층 가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13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책임준공 미이행 사업장을 보유한 신탁사들 가운데 영업용순자본비율(NCR) 관리 계획을 재검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법원이 책임준공 관련 소송에서 신탁사의 손해배상 책임 범위를 원리금 전액으로 인정한 판단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소송 리스크에 대비해 회계상 선반영해야 할 부채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7부는 이달 초 21개 새마을금고로 구성된 PF 대주단이 무궁화신탁을 상대로 제기한 책임준공 관련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무궁화신탁이 대주단에 대출원금 약 210억원과 지연 이자 전액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사실관계를 들여다본 재판부는 신탁사 측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보고, 계약서에 '손해'로 명시된 '대출 원리금과 연체이자' 부분을 근거로 전액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지난달 말 다른 새마을금고 PF 대주단이 신한자산신탁을 상대로 제기한 유사 소송 1심에서 신탁사 측의 전액 배상 판결이 나온 데 이어 두번째 사건에서도 법원이 대주단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한 부동산 전문 변호사는 "법원이 PF 대출 원리금과 책임준공 미이행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전면적으로 인정해 신탁사가 부담해야 할 리스크가 급격히 확대됐다"며 "사업장별 분쟁을 넘어 국내 PF 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예고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원 판단을 받아봤자 거액의 배상액을 면하기 어렵다고 본 신탁사들은 대주단과 협의를 검토하는 한편 재무 건전성 관리에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기업은 향후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손해나 비용을 즉각 충당부채로 회계에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아직 소송 결과가 나오지 않은 신탁사들도 재무 부담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기업의 재무 건전성을 나타내는 지표인 NCR 값이 대폭 내려갈 것으로 예상된다. NCR은 영업용순자본에서 위험자산 총액을 뺀 금액을 개별 사업별 필요 자기자본으로 나눈 값이다. 책임준공 사업장의 대출 원리금 전액이 차감 항목으로 반영되면서 NCR 값도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신탁사는 NCR 값을 최소 150% 이상 유지해야 하며, 이보다 낮으면 금융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을 수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책임준공 소송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작년 말 기준 국내 14개 신탁사의 평균 NCR 값은 937%로, 이 가운데 무궁화신탁(NCR 값 -195.5%), 한국토지신탁(269%), 한국자산신탁(284.1%) 등이 비교적 낮은 NCR 값을 나타냈다.
추원식 법무법인 YK 대표변호사는 "책임준공 미이행으로 인한 분쟁 사업장이 많은 신탁사일수록 NCR에서 차감 항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NCR 값 하락을 막기 위해 다른 영업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고 전했다.
현재 법원에 계류 중인 책임준공 관련 소송은 총 14~15건으로 추정된다. 법원이 수백억원대 배상액이 걸린 소송에서 연이어 대주단의 손을 들어준 만큼 추가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도 높다.
부동산 호황기에 신탁사들은 책임준공 확약으로 신용도가 낮은 중소 건설사의 신용을 보강해주는 대신 일반 수수료 대비 최대 10배 이상 높은 2~4%대 수수료를 가져갔다. 저금리 시대에 고수익을 좇아 너도나도 책임준공형 사업을 벌이면서 신탁업계의 외형도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고금리·고물가 등으로 건설경기가 침체하고 부동산 PF 위기가 본격화하면서 책임준공형 사업이 되려 신탁사의 발목을 붙잡았다. 시공사 부도 등으로 공사가 중단되면서 신탁사가 책임준공 의무를 떠안게 된 사례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3월 말 기준 14개 부동산신탁사의 신탁계정대는 7조8548억원으로 전년 동기(5조3861억원) 대비 45.8% 급증했다. 신탁계정대는 시공사의 자금 조달이 어려울 경우 신탁사가 사업비를 충당하기 위해 회사 고유계정에서 빌려주는 자금으로, 책임준공에 따른 재무 부담이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추 대표변호사는 "정부와 금융당국은 부동산 PF 시장의 급격한 위축을 방지하기 위한 대응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때"라며 "책임준공형 신탁의 위험 배분 구조 개선, 신탁사의 자본 확충 지원, 그리고 중소 건설사를 위한 대안적 신용보강 제도 도입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