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12·3 비상계엄 선포’에 일언반구 언급이 없는 게 불안하다.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아직은 대통령 취임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캐나다에는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라”고 하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를 미국의 주지사라고 칭한 트럼프 아닌가. 트럼프는 막말과 거짓말을 밥먹듯 해 온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가 1기 재임 기간에 거짓 또는 잘못된 주장을 펼친 게 총 3만573건이며 하루 평균 21건에 달했다고 집계한 바 있다.
트럼프는 막말이든 거짓말이든 협박이든 일단 질러 놓은 다음, 말을 바꿔가며 협상하는 스타일이다. 얻어낼 게 없으면 아예 입을 닫는다. 8년 전 한국이 딱 그랬다. 2016년 말 탄핵당한 박근혜 정부가 당시 트럼프 당선인 측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돌아온 것은 “죽은 정부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답이었다.
반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해선 집권 초반부터 ‘미치광이’ ‘꼬마 로켓맨’ ‘병든 강아지’라며 때리고 나섰다. 이유가 있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로부터 북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가장 시급한 미국의 안보 현안으로 인계받았고 이를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최대 압박’을 대북 전략으로 채택했다. 북한이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 도발을 이어가자 트럼프는 2017년 10월 항공모함을 한반도에 배치하고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에게 소개령을 내리려고 했다. 한국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 전쟁이 터지지 않기를 매일 기도했다고 할 정도로 긴박했다. 이 같은 일촉즉발 위기는 김정은이 2018년 초 대화 제의로 물러서자 누그러졌다. 밥 우드워드의 책 <분노>에 나온 내용이다.
트럼프가 김정은에 대해 최근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그와 잘 지낸다”고 한 것도 할 게 있어서다. 북한 핵문제를 다시 풀어보겠다는 생각이다. 이번에도 한국은 안중에 없는 듯하다. 일본처럼 돈 보따리를 들고 찾아가야 숟가락 하나 얹을까 말까 한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느닷없이 계엄을 선포하는 통에 일말의 기대조차 산산조각 났다. 트럼프의 무언(無言)이 이를 말해준다.
트럼프는 내년 1월 취임식 후 ‘코리아 패싱’ 상태에서 김정은을 상대할 공산이 크다. 현재로선 미국 정부가 짜놓은 시나리오 중 ‘중간 단계’ 해법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워싱턴 정가의 관측이다. 추가 핵무기 생산 및 ICBM 확대 중단과 경제 제재 해제를 거래하는 전략이다.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짜 놓은 한국의 각종 대북 전략은 무용지물이 된다.
한국의 독자 핵무장 가능성도 대폭 낮아졌다. 계엄 선포 전까지만 하더라도 트럼프 참모인 크리스토퍼 밀러 전 국방장관 대행이나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 등이 한국의 자체 핵억지력 보유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이제는 거론하는 이가 없다. 전시 상황에서나 가능한 비상계엄을 평상시에 선포하는 나라에 핵무기 버튼 소유를 용인할 리 만무하다는 분위기다.
주한미군 주둔 비용 협상력도 현저히 떨어졌다고 봐야 한다. 최고 동맹이라면서 계엄 선포 사실을 사전 통지하지 않은 한국 정부다. 7년 전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 사령관처럼 한국을 거드는 미군 지휘관을 이번엔 기대하기 힘들다. 트럼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에 방위비를 2.5배 인상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에도 거액의 청구서를 보낼 게 분명하다. 윤 대통령의 한순간 실수로 한국이 치러야 하는 후과(後果)는 이처럼 상상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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