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장애인이 대포통장을 판매하며 캄보디아 범죄단지에 들어간 사건에 대해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사회적 약자를 꼬드겨 통장을 개설하도록 하고, 금융사기를 벌이는 범죄단지에 팔아넘기는 악질적 인신범죄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통장이 범죄에 악용되지 않도록 금융권에서 이상거래 모니터링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24일 인천경찰청 형사기동대는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한국인 이모 씨(25)를 약취·유인 혐의로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 씨는 지적장애를 가진 박모 씨(26)를 대포통장 명의자로 내세워 로맨스스캠·리딩방 등 사기범죄를 벌이는 캄보디아 범죄단지에 알선한 혐의를 받는다.
캄보디아 교민들에 따르면 박 씨는 지난 가을 '캄보디아에 오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구인글을 보고 캄보디아에 입국했다. 자신 명의 통장 3개를 들고 '형제 단지'로 불리는 대규모 범죄단지에 들어갔다. 그러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쫓겨났다고 한다.
형제단지 조직원이었던 이 씨는 이 틈을 타 “일할 곳을 구해주겠다”며 박 씨를 자신의 집에서 감금한 뒤 베트남 국경 근처 차이톰(Chrey Thum)의 또 다른 범죄단지에 팔아넘겼다. 경찰은 박 씨를 최초로 알선한 'J9'라는 가명의 형제단지 조직원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
박 씨는 현지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지난 11월 한국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경찰은 박 씨가 최근 법인통장을 발급받아 다시 캄보디아로 출국하려 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가족에게 이를 알리는 등 보호 조치를 취했다.
최근 박 씨처럼 대포통장을 팔기 위해 캄보디아 범죄단지에 들어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단지에 들어가면 강제로 일을 시키거나, 그만두려는 경우 감금과 폭력을 당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김건 국민의힘 의원이 외교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캄보디아에서 한국인 납치·감금 사건은 2023년 21건, 올해 상반기엔 76건으로 급증했다.
캄보디아 범죄단지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포통장을 필요로 하는 범죄조직은 현지 ‘에이전시’를 통해 명의자를 모집한다. 에이전시는 소개비 명목으로 수수료를 받고 범죄단지에 통장 명의자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경찰 관계자는 “범죄단지 조직원들은 통장주가 한국에서 돈을 인출해 달아나는 ‘먹튀’를 막기 위해 명의자도 직접 단지에 오도록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범죄조직은 개인통장보다 법인통장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분석이다. 개인통장에 비해 인출 한도와 이체 한도가 높아 범행에 비교적 유용하기 때문이다. 법인통장을 개설하려면 먼저 법인을 설립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 필요한 각종 서류와 절차를 대행해주는 '브로커'들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브로커들은 주로 경제적 취약계층이나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접근해 “생활비를 지원하겠다”거나 “대출을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명의를 빌리거나, 통장을 받아낸다. 지난해 11월엔 노숙자와 신용불량자 명의로 유령 법인을 설립하고 통장을 개설해 범죄조직에 판매한 뒤 212억 원을 챙긴 조직이 경찰에 검거된 사례도 있었다.
서울경찰청에서도 현재 지적 장애인들에게 접근해 통장을 발급하도록 한 후 캄보디아 범죄단지에 조직적으로 판매한 대포통장 유통책에 대해 수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대포통장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법인명의 통장 개설을 까다롭게 하고, 은행의 이상금융거래탐지시스템(FDS)을 고도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FDS는 금융 거래 과정에서 부정 결제나 갑작스러운 대규모 입출금 등 이상거래를 탐지하고 차단하는 시스템이다.
황석진 동국대학교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사업자등록증에 적힌 사업장 주소에 대한 현장 실사를 도입하는 등 법인 통장 개설 과정을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며 “머신러닝 기술을 활용해 최근 사기범죄 동향과 명의자의 과거 기록을 분석함으로써 이상 거래를 정밀하게 탐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다빈 기자 davin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