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는 남태평양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표류, 무인도에 고립된 한 중년사내가 4년 만에 도시로 귀환하는 얘기를 다룬다. 페덱스(Fedex)의 임원 척 놀랜드는 시스템 효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빈다. 척은 일중독, 스피드 강박환자다. 모스크바의 페덱스 물류창고에서 러시아인 직원들을 교육할 때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지금 내 손바닥에 도착한 이 달걀타이머가 들어 있던 페덱스 상자는 내가 미국 멤피스에서 여기로 떠나며 부친 것이다. 87시간 22분 17초나 걸렸군. 너무 지체돼 나는 화가 난다. 87시간은 영원(永遠)처럼 길다. 국가도 전복시킬 수 있다. 흥망성쇠가 다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다. 더 빠르게. 알았나?’
척은 멤피스에서 여자친구 켈리와 동거 중이지만, 척이 하도 바빠 결혼도 못 하는 형편. 크리스마스이브에 척은 회사의 긴급호출로 화물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켈리가 자신의 사진을 넣은 회중시계를 선물해주자 척은 그 회중시계의 시간을 항상 그녀가 있는 멤피스에 맞춰두겠다고 한다. 이게 1995년 척이 로빈슨 크루소가 되기까지의 전사(前史)다. 무인도 해변에 떠밀려온 비행사의 시체를 매장해준 척은 그 죽은 조종사의 구두를 신는다. 아름다운 자연은, 생존의 공포와 절대고독으로 요약되는 지옥이 된다.
파도가 운반해준 몇 개의 페덱스 상자들을 개봉해 필요한 물건들을 조금 얻지만, 척은 유독 황금천사의 날개가 그려진 상자 하나는 그대로 간직한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The World on Time(전 세계로 제시간에 배달합니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척이 해양쓰레기 간이화장실 문짝으로 지붕 얹힌 뗏목을 노저어 항해하다가 맞이한 절망의 순간, 지나가던 컨테이너선에 구조받는 거라든가, 1500일 만에 문명세계로 돌아왔더니 자신이 죽은 줄로만 알고 시신 없는 관으로 장례식까지 치러준 켈리가 결혼해 딸까지 낳은 거라든가, 그런 그녀와 재회하는 슬픔 속에서 서로 깨닫는 운명의 선택 등이 아니라, 좀 ‘엉뚱한 것에서였다’.
무인도에서 척은 나무막대기를 나뭇조각에 비벼 불을 피우려 하지만 계속 실패한다. 그러던 척이, 페덱스 상자에서 꺼낸 배구공에 ‘윌슨’(Wilson)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대화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시점부터 척은 불 피우는 방법을 업그레이드해 마침내 불을 얻는다. 윌슨이 존재하면서부터 척은 마음이 잡히고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지혜와 의지를 발휘해 섬을 탈출한다. 폭풍우에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 날 뗏목의 노에 꽂아두었던 윌슨이 바다로 떨어져 유실돼버릴 때 척이 “미안해. 윌슨”이라고 연신 울부짖는 까닭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물론 척을 구원해준 요소들은, 황금천사의 날개가 그려진 페덱스 상자는 꼭 살아남아 직접 배달해주고 싶다라는 희망과 의무감, 회중시계 속 멤피스의 켈리에 대한 사랑 등등 여럿 발견된다. 하지만 그것들 중 으뜸으로 나는 ‘윌슨’을 꼽겠다.
지금 ‘정치적 대환란’에 휩싸여 사람들은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척 놀랜드처럼 ‘정신적 붕괴’를 겪고 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게 물어보는 그 행위 자체가 바로 당신의 해결책이라고. 왜냐하면, 지금 그에게는 내가 바로 ‘배구공 윌슨’이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간혹 우리는 함께 있는데도 각자 로빈슨 크루소가 된다. 배구공은 친구일 수도 있지만 ‘자신과의 대화’일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친구는 ‘자신과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일 것이다. 배구공 같은 친구가 단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남태평양 무인도에서 4년 만에 살아돌아오는 일 이상의 기적을 이룰 수 있다.
택배는 서두르면 빨라지는지 모르지만 인생은 그런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빠름 속의 성취보다 느림 속의 견딤이 더 요긴한 게 인생이다. 그게 인생의 ‘제시간 배달’이다. 자신과의 대화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면, 배구공이라도 붙들고 견뎌야 한다. 마음을 지켜야 한다. 마음을 잃으면 실존이 무너진다. 진짜 친구는 고통의 시기에 드러난다. 서로에게 배구공 윌슨이 돼라. 그게 역사를 구원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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