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사태’의 부정적 효과 중 하나는 각종 음모론이 정치 무대로 흘러들어올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2일 담화를 통해 계엄 선포 배경에 부정선거 음모론이 있음을 스스로 밝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전산 시스템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고, 지시를 받은 장군들은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어떻게 부정선거 증거를 찾을지 의논했다.
정치의 변방에 머물던 음모론이 주류로 진입하고 있는 시점이다. 국회의 탄핵안 가결로 터져 나온 광장의 환희가 가시기도 전에 한국 사회는 몇 개월이 걸릴지 모를 음모론과의 지루하고도 어려운 싸움에 빠져들었다.
계엄 사태로 활개 치는 음모론
그 선두에 권한은 정지됐지만 여전히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윤 대통령은 앞으로도 공식 석상에서, 탄핵안 심판 변론 과정에서 비슷한 주장을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벌써 일부 여권 지지자는 계엄군을 동원해 확보한 선관위 서버 자료를 통해 윤 대통령이 부정선거 증거를 폭로하고, 국면을 일시에 반전시킬 것이라는 주장을 퍼뜨리고 있다.윤 대통령은 음모론의 횡행을 막을 봉인도 풀어버렸다. 지난 늦여름부터 야당이 제기한 ‘계엄 음모론’을 그대로 실행한 것이다. 아무리 얼토당토않은 음모론이 나와도 합리적인 반박이 먹혀들기 어렵게 됐다. “계엄 선포 예상도 음모론으로 치부하지 않았냐”는 말에 무너진다. 그 틈을 타고 ‘출산 직후 아기를 사흘간 굶겨라’는 유사 과학을 신봉하는 최민희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은 유튜버 김어준 씨를 국회로 불러들여 “계엄군이 주한미군을 사살해 북한과의 전쟁을 촉발하려 했다”는 말을 전 국민이 듣게 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갖가지 음모를 지어내 퍼뜨렸던 이들이 또 어떤 말로 여론을 호도하려 들지 모른다.
과학적 사고로 맞서 싸워야
음모론 속에서 정치적 반대파는 악령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대화와 타협을 하기보다 ‘싹 잡아들여야 할’ 존재이고, 목적 달성을 위해 자국민을 상대로 생화학 테러도 실행할 이들이다. 음모론의 세상에서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상대의 존재 자체를 지우는 내전밖에 없다. 상식적인 정치 세력이 좌우를 떠나 음모론의 악령에 맞서 싸우기 위해 연대해야 하는 이유다.“주류 언론 대신 유튜버를 믿어라”는 말이 흔히 들리는 환경에서 음모론과 맞서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평생을 음모론과 미신 확산에 맞서 싸운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삶은 귀감이 된다. 1996년 별세한 그는 과학적이면서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음모론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마지막 저작인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을 세이건은 다음과 같은 격언으로 시작했다. ‘흑암이 몰려들 때, 그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촛불 하나를 켜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