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갤러리들의 서울 진출이 가속화하고 있다. 서울 종로·강남구 등에 밀려 ‘2등’ 취급받던 지역 기반 화랑들이 오히려 서울에 분점을 낼 정도로 세력을 키운 것이다. 지역 미술계와 장기간 교류하며 확보한 단골 수요층, 세계적인 블루칩 작가 반열에 오른 거장들을 미리 발굴한 선점효과가 이들의 무기다. 서울에 입성한 지역 갤러리 일부는 세계 미술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서울 아성 뚫은 지역 갤러리
지방 화랑들의 서울 진출은 최근 수년간 각 지역의 미술시장이 급성장한 것과 맞닿아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표한 ‘미술시장 실태조사’에 따르면 비수도권 화랑의 작품 판매 총액은 2017년 169억원에서 2022년 537억원으로 5년 만에 세 배 넘게 늘었다. 전국에서 비수도권 화랑이 차지하는 작품판매액 비중도 같은 기간 7%에서 12%로 뛰었다.미술품 수요 증가는 지역 갤러리들이 확장·이전을 위한 ‘실탄’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 12일 서울 성북동에 분점을 차린 우손갤러리가 그런 사례다. 이은주 우손갤러리 디렉터는 “지난 10여 년간 대구 미술계와 함께 성장해왔다”며 “작품을 평가하고 감상할 수 있는 미술 애호가로 거듭난 단골손님들이 갤러리의 자산”이라고 말했다.
2012년 대구에 문을 연 우손갤러리는 해외 미술계의 최신 흐름을 한발 앞서 국내에 소개해왔다. 토니 크랙, 션 스컬리, 데니스 오펜하임, 야니스 쿠넬리스 등 거장들의 국내 첫 개인전을 유치했다. 이번 서울점 개관 기념 전시로는 생태주의 작가 파브리스 이베르 개인전을 마련했다. 199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최고 권위의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가다.
마찬가지로 대구에 기반한 갤러리신라도 2022년 서울 삼청동에 지점을 냈다. 1992년 설립 이후 박서보, 윤형근 등 한국 단색화 작가들을 소개하며 몸집을 불린 결과다. 이준엽 갤러리신라 디렉터는 “화장실도 없던 13㎡ 규모 전시장으로 서울에 진출했다”며 “장기간 교류한 지역 출신 거장들이 먼저 전시를 제안하는 등 지원에 힘입어 성장했다”고 말했다.
“서울뿐 아니라 세계와 닿을 것”
지역 갤러리 성장에는 최근 몇 년간 한국 미술의 국제적인 위상이 강화된 점도 한몫했다. 2010년대 한국 단색화와 실험미술 등이 연달아 해외 미술계에서 주목받자 작가들과 전속계약을 맺어온 지역 화랑들이 동반 성장했다. 지역 내 작가를 발굴하고 해외 전시와 판매를 지원한 그간의 투자가 열매를 맺은 것이다.5월 서울 장충동에 지점을 연 부산 조현화랑이 단적인 예다. 조현화랑은 박서보, 김종학, 윤형근 등 국내 작품 낙찰가 최상단을 달리는 작가들과 수년간 전속계약을 맺었다. ‘숯의 화가’ 이배를 일찌감치 발굴한 점도 주효했다. 이배 작가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작품 한 점 팔지 못할 정도로 암울한 시절이 있었는데 1998년 조현화랑 개인전을 계기로 숨통이 트였다”고 말했다. 이배 작가는 3분기 기준 국내 작가 낙찰총액 1위(11억6060만원)를 기록했다.
‘서울 입성 1세대’ 화랑인 대구 리안갤러리도 해외 진출을 앞둔 국내 작가들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김춘수, 남춘모 등 후기 단색화와 이건용, 이강소 등 실험미술 계열이 대표적이다. 곽지수 리안갤러리 큐레이터는 “이건용 화백과 처음 전시 계약을 맺은 2016년만 하더라도 작가의 캔버스 작업이 거의 없던 시기”라며 “이듬해 리안갤러리 개인전을 기점으로 기존 작업 방식에서 벗어난 신작이 대거 나왔다”고 말했다. 이건용 화백은 이로부터 5년 뒤인 2022년 다국적 상업화랑인 페이스갤러리와 전속계약을 맺었다.
지역 갤러리의 해외 진출도 활기를 띠는 추세다. 지난 6~8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트 바젤 마이애미비치에 리안갤러리와 우손갤러리가 처음 참가하며 신고식을 치렀다. 우손갤러리는 6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아트 바젤에 국내 지역 갤러리 중 최초로 참가했다. 조현화랑은 지난달 막을 내린 이배 작가의 베네치아 비엔날레 병행 전시를 주관했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