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1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인근 한 분식 가게. 대학생 안혜민(22) 씨는 점원에게 “집회하러 왔습니다. 김밥 한 줄이요”라고 외친 뒤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이 분식점은 익명을 요구한 시민 다수가 김밥 800줄을 ‘선결제’한 곳이다. 조건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성 집회에 참여한 이들이다.
안 씨는 “교과서에서만 배운 비상계엄을 현실에서 만나리라곤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며 “여의도는 차갑지만, 이런 따뜻한 마음 덕분에 학생들과 시민들이 집회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탄핵소추안 재표결이 이뤄지는 이날, 국회의사당 주변 카페들은 선결제 음료와 음식을 수령하려는 시민들로 붐볐다.
국회의사당 근처 한 카페 직원은 “계엄 사태 직후부터 선결제 주문이 시작됐고, 어제오늘은 평소보다 주문이 5배 이상 몰렸다”고 말했다.
심지어 ‘시위도 밥 먹고’라는 이름의 온라인 플랫폼까지 등장해, 선결제 상품이 있는 카페와 식당의 위치 및 재고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기도 했다.
사이트에 표시된 한 카페는 기부자의 요청으로 이날 하루 무료 음료를 제공했다. 카페 곳곳에는 “오늘만 이용 가능한 선결제 상품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또 다른 선결제 음료 수령자인 20대 혜진 씨는 “8년 전 탄핵 시위 때는 핫팩과 방석을 나눠주는 시민들이 있었는데, 그 마음이 이제는 음료 선결제로 발전한 것 같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따뜻한 사람들의 온도가 높아서 전혀 춥지 않다”고 덧붙였다.
선결제 운동의 여파는 단순히 음료와 음식에 그치지 않았다. 집회 현장 인근의 화장실 위치, 주말에 영업하는 식당, 몸을 녹일 수 있는 쉼터 등을 표시한 지도 서비스도 속속 등장했다.
SNS와 연결된 시대에 시민들의 연대 의식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집회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선결제를 통해 기여하려는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집회에 참여하는 이들도 뚜렷한 당색이 없다. 여당도, 야당도 지지하지 않는다. 이들은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제발 그냥 누워있게 해줘라 우리가 집에서 나와서 일어나야겠냐)', '전국 뒤로 미루기 연합(그러나 더는 미룰 수 없다)', '화분안죽이기실천시민연합' 등 일반 시민임을 강조한다.
이번 선결제 운동은 한국 시민들이 집회와 연대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시민 참여 방식에 신선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외신도 주목하고 있다. 로이터 등 외신들은 K팝 콘서트장에서나 보던 LED 응원봉이 한국 집회 현장에서 새롭게 빛을 발하고 있다며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대한민국으로 주목했다.
지난 2016년 박근혜 탄핵 시위 때까지 저항의 상징이던 촛불을 든 엄숙한 분위기와 달리, 이번엔 콘서트장에서나 보던 값비싼 응원봉과 흥겨운 K팝이 촛불 대신 집회 열기를 달구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집회 참가자들에게 무료로 핫팩이나 커피 등을 제공하는 문화까지 생겼다며, 구세대에겐 한국 시위 문화의 극적인 변화로 여겨지고 있다고 짚었다.
외신들은 1차 표결에 불참한 여당 의원들에게 보낸 근조 화환 항의에도 관심을 보였다.
촛불에서 진화한 한국의 저항 문화가 지지와 연대를 만들고, K-집회의 새로운 문화적 현상이 되고 있다고 외신들은 해석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