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더불어민주당이 강행 처리한 ‘양곡관리법’ ‘예산안 자동부의 폐지법’ 등이 그대로 시행될 가능성이 커지자 국민의힘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14일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돼 직무가 정지될 경우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을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신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느냐를 두고 논란이 커진 상태다. 법적으로는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견해가 많지만, 정치적으로는 큰 부담을 느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권성동 “6개 법 대통령 거부권 요구”
13일 국회 및 정부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양곡관리법과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안법), 농어업재해보험법, 농어업재해대책법 개정안 등 이른바 ‘농업 4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이 밖에 예산안의 본회의 자동 부의를 폐지하는 국회법 개정안, 국회 동행명령 범위를 대폭 확대하는 국회증언감정법 개정안 등도 함께 통과됐다. 이들 법안은 지난 6일 정부에 이송됐다. 정부가 오는 21일까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법안은 공포 6개월 후 시행될 예정이다.
이들 법안은 비상계엄 및 탄핵 정국이 아니었다면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권성동 신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6개 법안은) 당시 추경호 원내대표가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행사를 정식 요청했고, 이 요청은 유효하다”며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행사를 다시 한번 요청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17일 국무회의에서 양곡법 개정안 등 농업 4법의 재의요구권을 안건으로 올려 심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양곡법 개정안은 쌀이 과잉 생산돼 쌀값이 떨어지면 정부가 남는 쌀을 매입해 가격을 부양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정부는 이 법이 시행되면 만성적인 쌀 공급 과잉 현상이 더 심화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국회법 개정안은 여당이 ‘국가 예산 발목잡기법’이라며 반발해 왔다.
○거부권 행사 시 총리 탄핵 가능성
대통령 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가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기간에 고건 당시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 자격으로 ‘거창 양민 학살사건 보상 특별법’과 ‘사면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학계에선 의견이 엇갈린다.차진아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사면권,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 등 국가원수 지위로 행사하는 고도의 정책적 권한은 총리가 대행하기 어렵지만, 법률안 거부권은 정부 수반으로서 졸속 입법에 대해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창현 한국외국어대 로스쿨 교수도 “재의요구권은 대통령으로서 통상적인 업무 수행의 일환”이라며 행사 가능에 무게를 뒀다. 하지만 임지봉 서강대 로스쿨 교수는 “권한대행은 현상유지적 (대통령) 권한만 행사할 수 있다”며 “거부권은 현상유지적 권한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다”고 밝혔다.
한 총리가 야당으로부터 내란 동조자라는 공격을 받고 있어 거부권 행사에 큰 부담을 느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정부 관계자는 “수사선상에 있는 한 총리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민주당이 한 총리까지 탄핵소추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야당은 이미 대통령 탄핵 이후 권한대행 체제까지 흔들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서영교 민주당 의원은 이날 라디오 방송에서 “(한 총리는) 비상계엄을 같이 심의한 공범이고 탄핵·처벌 대상이라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김동현/김종우/정상원 기자 3co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