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경남 김해에 있는 한 리조트 대강당. LG전자 H&A사업본부(생활가전)의 팀장급 이상 임직원 500여 명이 모인 워크숍 현장에 마련된 큼지막한 스크린이 한 기사로 가득 채워졌다. 기사 제목은 ‘백미러에 LG가 보인다’. 2004년 6월 한국경제신문에 보도된 기사다. 당시 세계 최대 가전업체였던 일렉트로룩스가 이런 글을 사보에 게재하며 전 직원에게 “LG전자와 삼성전자가 턱밑까지 쫓아왔다”며 ‘한국 기업 경계령’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이날 연설자로 나선 류재철 H&A사업본부장(사장)은 “이 기사에서 일렉트로룩스를 LG전자로, LG전자를 하이얼 등 중국 기업으로 바꾸면 그게 바로 요즘 글로벌 가전시장 판세”라며 “20년 전에는 LG가 일렉트로룩스를 추격하는 쪽이었지만 지금은 중국에 쫓기는 입장이 됐다”고 했다. 류 사장은 “지금 방식으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금 방식으론 승리 못해”
이날 워크숍은 류 사장이 주재한 ‘GIB(Go Into Battle)’ 행사의 일환이었다. GIB는 그해 나온 문제를 강도 높게 반성하고 내년도 목표 달성 의지를 다지는 H&A사업본부의 리더십 워크숍이다. 류 사장이 ‘한계 돌파’를 주문한 것은 중국 가전을 단순한 저가 공세로만 치부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LG전자는 지난 1년6개월간 중국 현지 실사와 정밀 분석을 거쳐 중국 가전업체의 기술력을 들여다봤다. 그 결과 한국과의 기술 격차가 크게 좁혀졌고, 몇몇 분야에선 오히려 중국이 앞선 것으로 확인됐다고 류 사장은 설명했다. 지금 중국의 공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면 LG전자가 일렉트로룩스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일렉트로룩스는 가정용 진공청소기(1912년)와 로봇청소기(2001년)를 세계 최초로 내놓는 등 혁신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더 이상 혁신 제품을 내놓지 못한 데다 가격 경쟁력에서 한국과 중국 기업에 밀려 세계 6위(매출 기준)로 내려갔다.
○미래 먹거리 위협하는 中 가전
류 사장은 로봇청소기뿐만 아니라 냉장고, 세탁기 등 핵심 가전제품에서도 중국이 한국을 다 따라잡았다고 설명했다. 빌트인(내장형) 가전이 대표적이다. 빌트인은 주변 가구와 간격을 좁히는 것이 기술력의 핵심으로 꼽힌다. 하이얼의 빌트인 냉장고는 옆 가구와의 간격을 업계 평균(20㎜) 대비 5분의 1 수준인 4㎜로 좁혔다.에너지 효율도 중국이 잘하는 분야다. 하이센스 냉장고의 에너지 효율은 유럽에너지등급(ErP) A등급 대비 30% 전력을 덜 소모한다. 에너지를 덜 소모한다는 것은 모터와 부품 성능이 좋음을 의미한다.
류 사장은 중국의 추격을 뿌리칠 방안으로 프리미엄 시장과 중저가 시장을 동시에 공략하는 ‘투트랙 전략’을 설명했다. 프리미엄 시장에서 일군 높은 브랜드 파워를 활용해 ‘중국판’이 된 중저가 시장에 침투해 시장을 뺏어오겠다는 것이다. LG전자는 이를 위해 타깃 고객을 소득 수준 상위 60%에서 70~90%로 확대하기로 했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제품을 내놓지 않다가 몰락한 유럽 가전업체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다.
중국이 아직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인공지능(AI)과 보안 기능을 활용해 상품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LG전자가 세운 핵심 방어 전략 중 하나다. 제2의 구독 사업처럼 가전 관련 서비스를 강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구독 사업은 일반적인 제품 판매보다 수익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고객 록인 효과도 큰 편이다. LG전자의 가전 구독 매출은 올해 1조8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류 사장은 “가전 시장 패러다임을 바꿔 중국 업체 추격을 뿌리치자”고 강조했다.
박의명 기자 uimy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