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과', '금배', '금배추'처럼 과일과 야채값이 철마다 치솟으면서 소비자들이 한숨을 짓게 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왜곡된 유통구조가 문제라면, 가격이 치솟을 때 사과나 배를 수입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건국 이래 사과와 배를 단 한 알도 수입한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한국의 위생검역(SPS)이 워낙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K-검역'이라는 달갑지 않은 이 이름이 한국 소비자는 물론, 한국과 무역을 확대하려는 교역 상대국까지 곤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 한국의 까다로운 위생검역(SPS)을 문제 삼는 나라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출 시장을 넓히기 위해 FTA 체결국을 세계 1위로 늘린다는 정부 목표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어, 검역 정책을 유연하게 운용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통상당국에 따르면, 한국과 FTA 재협상을 벌이는 여러 국가들이 한국의 검역 절차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을 회원국으로 둔 세계 5대 경제블록 메르코수르와는 2021년 9월까지 총 일곱 차례 공식 협상을 진행했으나, 검역 문제에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 협상이 결렬됐습니다.
정부는 올해 메르코수르와 협상을 재개할 방침이지만, 검역 문제로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2년 3월 협상 재개를 선언했음에도 2년 넘게 공식 협상이 없는 멕시코와의 장애물 역시 검역 문제로 전해집니다.
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8월22일 브리핑에서 “여러 나라 통상 당국자로부터 검역 문제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발표한 통상정책 로드맵에서 정부는 현재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85% 규모인 FTA 협정국을 90%로 높인다는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검역은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모든 나라는 세계무역기구(WTO)의 기준에 따라 이를 엄격하게 운영합니다. 협상 상대국이 공통적으로 문제 삼는 부분은 ‘한국이 검역을 무역장벽으로 악용한다’는 점입니다.
1989년 호주가 사과 수출을 신청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수입한 적 없는 사과와 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금사과’ 논란으로 불거진 농산물 수입 제한이 국내 소비자 문제를 넘어 통상 이슈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 수출을 신청했다면 이미 절차가 끝났을 농산물이 한국에서는 10년 넘게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최근 한국 통상관료들이 FTA 협상장에서 자주 듣는 불만입니다. 국제사회에서 ‘사과와 배를 수입하지 않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비슷한 문제를 제기하는 나라가 늘어났습니다.
한 통상관료는 “한국이 우리나라에 자동차와 휴대폰을 열심히 팔면서 왜 협정문에 개방을 약속한 우리 농산물은 검역을 이유로 수입하지 않느냐”고 지적하면 할 말이 궁해진다고 했습니다.
메르코수르와 멕시코와의 협상이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도 한국은 공산품을 더 많이 개방하라는 반면, 상대국은 검역 시장의 틈을 넓히라는 입장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세계무역기구(WTO) 기준에 따라 검역 절차를 엄격하게 운영합니다. 국민 건강에 직결되는 문제이자, 병해충이 유입될 경우 방제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은 검역 절차가 특히 까다롭고 기간이 긴 나라로 분류됩니다.
호주는 1989년, 일본은 1992년에 한국에 사과 수출을 신청했지만 30년 넘게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2016년에 사과를 1순위 수출 농산물로 신청한 독일도 8년이 지나도록 8단계 검역 절차 중 4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수출대국이면서 자국 농산물 보호 여론이 강한 일본도 미국, 뉴질랜드, 중국 등과 사과 수입을 두고 갈등을 겪었습니다. 일본은 1971년 6월 사과 수입을 자유화했으나, 미국과 유럽, 중국산 사과는 병해충 발생국이라는 이유로 금지했습니다.
1993년 미국 사과 농가의 항의가 이어지자 그해 6월부터 방제 강화를 조건으로 뉴질랜드, 미국, 프랑스, 호주산 사과의 수입을 허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은 검역 정책이 상대적으로 유연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협상 상대국들은 한국이 검역의 기본 원칙인 동등성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검역 절차를 사실상 비관세장벽으로 악용한다고 지적합니다. 동등성의 원칙이란, 새로운 방식으로 기존 방법과 동일한 수준의 방제 효과가 있음을 입증하면 동일한 검역 방식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대부분의 식물에 대해 훈증(40도 이상의 가스를 쐬거나 쪄서 병충해를 제거하는 방식)을 요구합니다. 훈증은 냉동·냉장 유통되는 과일의 상품성에 치명적인데도, 약품 처리나 저온 보관 등 다른 방식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대국의 불만입니다. 일본은 뉴질랜드산 사과에 대해 훈증 외의 방제 방식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약 5만여 가구에 달하는 사과와 배 농가를 보호하는 것도 검역당국이 까다로운 검역 제도를 유지하는 배경으로 꼽힙니다. 하지만 개방을 기회로 삼은 사례도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입니다.
값이 싼 칠레산 포도와 미국산 소고기가 들어오면 국내 농가가 모두 망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포도 농가는 샤인머스캣 등 고부가가치 품종을 개발해 위기를 넘겼고, 국내 소고기 시장도 한우와 수입 소고기 중심의 일반 시장으로 계층화되었습니다.
일본도 미국·뉴질랜드산 사과가 유입되면 자국 농가가 망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31년이 지난 현재 수입 사과 비율은 5%에 불과합니다. 소비자들이 품질이 우수한 자국산 사과를 선택한 결과입니다.
검역의 무역장벽화가 부메랑이 되어 우리 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도 통상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부분입니다. 2004년 34억 달러이던 한국 농수산식품 수출액은 2023년 120억 달러로 늘었습니다.
정부는 올해 135억 달러, 2027년까지 230억 달러로 ‘K푸드’ 수출을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통상당국 관계자는 “상대국이 우리나라에 동일하게 ‘검역 비관세장벽’을 적용할 경우 목표 달성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농업문제 전문가인 서진교 GS&J 원장은 “상대국이 한국을 검역을 무역장벽으로 악용한다는 의심을 갖지 않도록 정책에 유연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습니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