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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800년 만의 '대리인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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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한국에 연구개발(R&D)센터를 세운 일본계 부품기업은 최근 철수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당시에도 노조 리스크를 지적하며 생산공장 대신 R&D센터로 축소했는데 이마저도 없애려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이사 충실 의무가 확대되면 의사 결정이 지연되고 모험적 투자는 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최근 상법 개정 논쟁을 바라보는 회원사 임원들의 우려도 다르지 않다.

이사 충실 의무 논쟁의 기원은 약 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세기 영국에서 십자군전쟁에 출정하는 기사들은 두고 가는 가족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믿을 만한 공동체에 토지 소유권을 양도하며 “토지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내 가족에게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른바 ‘유스(use)’라는 법제도다. 도입 초기 기사나 성직자 사이에 널리 활용된 가운데, 소유권을 넘긴 주인과 수익을 제공하지 않으려는 대리인 간 분쟁도 이어졌다. 그렇다고 제도가 바뀌진 않았다. 대리인이 주인에게 수익을 주고 안 주고는 법이 아니라 양심의 영역이라는 판단에서다. 제도를 뜯어고쳐 봤자 법의 근간만 흔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회사법상 이사의 신인 의무(fiduciary duty)’다.

이 같은 800년 전 유럽의 논쟁이 최근 한국에서 재연되는 분위기다. 자본시장 밸류업 차원에서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는 물론 그 회사에 투자한 주주에게까지 확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회사나 지배주주에게 이익이 돼도, 다른 주주에게 손해가 발생하면 이사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상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소액주주를 보호하면 증시로 자금이 몰려 주식시장 저평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경제계 우려가 크다. 우선 주주는 이사와 직접 계약한 당사자가 아니다. 이사와 회사 간 이해충돌 소지가 있을 때 회사 이익을 최우선으로 일하라는 애초 취지와 동떨어진 얘기다. 또 의견이 다를 수 있는 여러 주인을 섬겨야 하는 상황도 우려스럽다. 한국에선 상장사당 평균 5743명의 개인주주가 존재하는데 이 모든 주주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결국 이사회는 책임소재를 피하고자 당장의 주가가 내려갈지 모를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보다는 보수적인 경영에 몰두하게 돼 기업의 역동성이 저하될 가능성이 크다. 덩달아 우리 경제의 활력도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전 규제보다 이미 법에 규정된 사후 구제 수단을 잘 활용해 적극적 투자를 유도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 800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주주의 충실 의무는 ‘규제보다 당사자 간 충분한 소통을 통해 소액주주를 설득하는 사회적 규범적 성격이 강하다’는 생각이다. 경제의 본원적인 경쟁력을 키워 기업가치 제고 방안을 다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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