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항공업계가 손잡고 앞으로 5년 동안 '항공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세계무역기구(WTO) 민간 항공기 교역 협정(TCA) 가입과 아직 걸음마 단계인 항공 제조업계의 자립화를 순차적으로 추진한다.
항공업계는 항공기 정비(MRO) 산업 허브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반면 항공 제조업계는 선진국들과의 완전 경쟁 체제에 노출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항공부품 '홀로서기' 조건 TCA 가입
10일 정부와 항공업계에 따르면 대한항공 등 국내 항공사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항공 제조업계, 관할 부처인 국토교통부와 방위사업청은 최근 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 통산교섭본부장 주재로 TCA 가입을 위한 간담회를 열었다.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은 항공 제조업계의 홀로서기를 위한 ‘항공사·항공 제조업체 상생 방안’을 마련하는 조건으로 5년에 걸쳐 TCA 가입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먼저 항공 부품 수입관세 면제의 일몰기간을 5년 연장하기로 했다. 항공 부품 국산화와 자립화 여건을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자는 취지다. 이를 위해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수입 항공기 부품 면세의 일몰 기한을 2029년까지 연장하는 법안(관세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이후에는 2~3년 정도 걸리는 TCA 가입 절차를 밟아 일몰이 끝나는 5년 뒤에는 TCA 가입과 ‘K항공 부품 자립’을 동시에 달성한다는 구상이다.
상생안에는 항공사가 국산 항공 부품을 일정 비율 이상 사주는 구매계획서, 항공 제조업체가 부품을 국산화하면 사주기로 약속하는 구매 조건부 연구·개발(R&D) 등 항공 제조업체들의 판로를 보장하는 방안들이 담길 것으로 기대된다.
산업부 관계자는 "국내 항공부품 산업이 홀로서기 할 수 있도록 항공사들이 항공 제조업체들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TCA 가입을 추진한다는 공감대를 마련한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인천국제공항, MRO 허브 도약하나
TCA는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EU), 영국, 대만 등 33개 회원국이 항공기 교역과 관련한 국제 규범을 주도하는 무역협정이다. TCA 회원국들은 항공기 부품을 무관세로 교역한다. 비회원국인 한국은 관세법에 일몰조항을 두고 5년마다 이를 연장하는 방식으로 외국산 부품의 관세를 면제해 왔다.
하지만 원산지 증명이 어려운 항공산업 특성 때문에 면세를 맡는 부품 비율은 23%에 그쳤다. 항공사들이 수입 항공 부품의 면세 혜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TCA 가입을 희망해 온 이유다.
항공 부품 면세는 세계적으로 급성장하는 MRO 산업 허브 경쟁에 뛰어들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꼽힌다. 신규 항공기 도입 비용보다 도입 후 수십 년간 소요되는 MRO 비용이 네 배 이상일 정도로 항공 MRO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2021년 정부는 ‘MRO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하고, 2026년까지 인천에 첨단복합항공단지 클러스터를 조성할 예정이다. 하지만 수입 부품에 부과되는 관세와 미성숙한 국내 항공 제조산업이 발목을 잡고 있다. 국산 항공부품이 아직 선진국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데 항공 부품을 비싼 값에 수입해 와서는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 최대 허브 공항을 놓고 인천국제공항과 경쟁하는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은 하루 1000여편에 달하는 국제선 항공편 뿐 아니라 기체 관리와 정비를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규모 MRO 산업 단지가 경쟁력으로 평가받는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항공기 부품에 대한 면세 제도가 대안 없이 폐지되면 정비비 지출이 늘면서 원가 상승 요인이 되고 결국 항공요금이 오르게 된다"고 말했다. 지방공항을 거점으로 운항하는 저가 항공사(LCC)들은 수익을 보전하기 위해 국내선을 줄이고, 국제선 운항을 늘릴 수 밖에 없어 지역경제 발전과 지역 주민들의 편의성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다.
올해 출범한 우주항공청이 추진하는 항공 부품의 글로벌 생산기지화도 차질을 빚어 항공 우주산업의 제조·정비 분야의 국제경쟁력을 크게 떨어뜨릴 가능성도 있다고 관련 업계는 우려했다.
국산헬기 수리온, 美 블랙호크와 경쟁해야
반면 TCA에 가입하면 아직 걸음마 단계인 국내 항공 제조산업은 미국 등 선진국과의 완전 경쟁 체제에 노출될 수 있다. TCA 회원국은 정부의 자국 항공산업 지원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간접적으로 지원해 온 보조금이 끊길 수 있다고 항공 부품업계가 우려하는 이유다.
국내 항공 조달사업도 타격이 예상된다. KAI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중형헬기 수리온은 국내 지방자치단체, 경찰·소방당국 등이 도입하고 있다. 기술력을 인정받은 결과지만 해외 경쟁사 입찰을 간접적으로 배제한 조달 제도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TCA 가입으로 헬기 조달 시장이 완전경쟁 체제로 전환하면 수리온은 미국의 블랙호크, EU NH90, 이탈리아와 영국의 EH101 등 선진국 모델과 경쟁해야 한다.
2022년 기준 국내 항공 제조산업 규모는 11조4558억원 규모로 1년 새 33% 성장했다. 세계적으로도 항공제조산업은 약 3700억달러 규모로 연평균 19.6%의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결국 TCA 가입과 ‘K항공 부품 자립’ 동시 달성의 성패는 항공업계가 항공제조업계가 받아들일수 있는 상생안을 제시하느냐에 달렸다는 분석이다. 지금까지 두차례 실무회의를 거친 두 업계는 연말까지 상생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신정은/정소람/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