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 기준으로 보면 정용진 회장의 이마트 쪽이 신세계의 2배 정도 된다. 한국의 대기업 가운데 남매가 이 정도 비율로, 브랜드 이미지를 고려하면 사실상 동등한 수준으로 나눠 갖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이명희 총괄회장의 삶과도 연관돼 있다는 분석이다. 이 회장은 아버지인 이병철 창업자와 가장 닮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4남 6녀 중 5녀가 설 자리는 넓지 않았다. 신세계백화점 2개와 조선호텔만을 들고 분리해 나왔다. 그리고 매출 71조원의 신세계그룹을 일궜다. 이명희 회장은 딸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열어준 첫 오너가 된 셈이다.
◆ 정유경, 9년 만에 승진…계열분리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의 딸인 정유경 총괄사장이 9년 만에 회장단으로 올라섰다. 지난 10월 30일 신세계그룹은 2025년 정기 임원인사를 단행하고 정유경 총괄사장을 (주)신세계 회장으로 승진시켰다고 밝혔다. 2015년 12월 총괄사장으로 승진한 지 9년 만이다. 정유경 회장은 백화점 부문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신세계그룹은 정유경 총괄사장의 회장 승진은 책임경영을 강화하고 계열분리의 토대 구축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룹을 백화점 부문과 이마트 부문이라는 두 개로 분리해 새로운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것으로, 이번 인사를 시작으로 계열분리가 가속화될 전망이다.
신세계그룹은 2019년 (주)신세계와 이마트가 실질적인 지주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백화점 부문과 이마트 부문을 신설, 계열분리를 위한 사전 준비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백화점 부문은 신세계백화점을 비롯해 패션·뷰티, 면세와 아울렛 사업을 통해 시장 경쟁력을 확대해왔다. 이마트 부문 역시 이마트를 구심점으로 스타필드, 스타벅스, 편의점과 슈퍼 등 고객의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담당하는 기업으로 포지셔닝하려는 노력을 폈다.
신세계그룹은 올해가 본업 경쟁력 회복을 통한 수익성 강화 측면에서 성공적인 턴어라운드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간 물밑에서 준비해온 계열분리를 시작하는데 적절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 이명희의 신세계, 마트-백화점으로 분리
신세계그룹은 지난 1991년 삼성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를 선언했다. 이어 1997년 공정거래법상 삼성그룹과 완전히 계열분리했다. 그리고 27년 만에 다시 계열분리를 선언한 셈이다.이후 이명희 총괄회장은 신세계백화점에 이어 할인점 사업에 진출, 이마트의 오늘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아버지인 이병철 선대회장이 ‘여자도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경영 참여를 설득한 끝에 이 총괄회장은 1979년 신세계백화점 영업본부 이사로 입사했다.
신세계백화점 총 2개 지점(본점, 영등포점)과 조선호텔로 시작한 신세계그룹은 1997년 33위에서 2000년 29위, 2005년 16위, 2015년 13위까지 올라섰다. 현재 신세계의 재계 순위는 11위(2023년)를 유지하고 있다. 협동조합인 농협을 제외하면 10위에 해당한다.
이 기간 동안 백화점은 출점한 지역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다졌으며 이마트 역시 153여 개 점포망을 바탕으로 국내 최대의 대형마트가 됐다. 또 스타필드와 스타벅스, 면세, 패션·뷰티, 이커머스 등 고객의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걸쳐 강력한 경쟁력을 쌓아왔다. 올해는 백화점이 상반기까지 사상 최대 매출을 이어가고 있다.
할인점 사업이 내리막을 걸으면서 이마트는 수익성 개선에 집중하고 있다. 상반기 기준 영업이익이 지난해보다 519억원 증가했으며 연간 기준으로도 2020년 수준으로 회복할 것으로 기대된다.
◆ 재계 순위 10위 신세계, 남은 작업은
신세계에 따르면 이번 인사 이후 이마트 부문과 백화점 부문을 분리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한다. 정용진 회장은 이마트 지분을 18.6%, 정유경 회장은 (주)신세계 지분을 18.6% 보유하고 있다. 이명희 총괄회장은 이마트와 (주)신세계 각각 10%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 지분을 고스란히 아들·딸에게 넘겨주면 지분상속은 끝난다. 잡음과 마찰이 일어날 소지를 사전에 없앤 전략의 결실이다.현재 이마트 계열사로는 △신세계프라퍼티 △신세계푸드 △조선호텔앤리조트 △SSG닷컴 △G마켓 △이마트24 △SCK컴퍼니(스타벅스) 등이 있다. 대형마트, 편의점, SSM(기업형 슈퍼마켓), 식음료(F&B), 호텔 등이 주요 사업이다.
신세계백화점 계열사로는 △신세계인터내셔날 △신세계디에프 △신세계센트럴시티 △신세계까사 △신세계라이브쇼핑 등이 있다. 백화점, 면세점, 패션·뷰티, 호텔, 리빙 등이 주요 사업이다.
계열분리에는 수년이 걸릴 수 있다. 우선 법적 분리가 필요하다. 친족독립경영 신청 이후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 심사를 받는 과정을 거친다. 공정위는 기존 그룹사와 독립하는 회사의 임원 겸임, 채무 보증, 자금 대차, 법 위반 전력 등을 따진다. 이마트 측의 신세계 계열사 지분 보유율, 신세계 측의 이마트 계열사 지분 보유율이 각각 상장사 3% 미만, 비상장자는 10% 미만이어야 한다.
공정위는 이들 회사가 친족 분리 기준을 충족한다고 판단하면 계열분리를 승인하게 된다.
현재 신세계의 전체 매출은 71조원에 달한다. 공정자산총액 기준으로는 62조517억원으로 농협을 제외하면 재계 순위 10위 기업이다. 만약 계열분리가 승인될 경우 이마트 부문은 자산 약 43조원, 신세계는 19조원 규모가 된다. 각각 재계 11위, 26위로 내려갈 전망이다.
◆ 임원 인사도 단행
신세계그룹은 정유경 (주)신세계 회장 승진과 함께 임원 인사도 단행했다. 이번 인사는 정용진 회장의 취임 첫해 인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회사는 성과가 있는 곳에 보상이 있다는 신상필벌의 원칙 아래 역량 중심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발탁했다는 설명이다. 지난 3월 정용진 회장 취임 이후 비상경영 체제를 통해 본업 경쟁력 강화를 통한 수익 극대화를 추진해온 만큼 2025년에도 이를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강화해나갈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겠다는 의미다.
먼저 한채양 이마트 대표이사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한다. 한 사장은 이번 승진을 통해 본업 경쟁력 강화에 더욱 속도를 내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마트24 대표에는 송만준 이마트 PL/글로벌사업부장이 내정됐다. 이는 올해 선보인 ‘노브랜드 중심 편의점 모델’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최근 사업 조정을 통해 혁신을 지속하고 있는 신세계푸드 대표에는 강승협 신세계프라퍼티 지원본부장이 선임됐다.
김홍극 신세계까사 대표는 신세계인터내셔날 뷰티&라이프부문 대표를 겸직하게 됐으며 조선호텔앤리조트 대표에는 전상진 이마트 지원본부장이 내정됐다. 신세계L&B 대표에는 마기환 대표를 다시 데려왔다. 신세계야구단 대표에는 김재섭 이마트 기획관리담당이 발탁됐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