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당 정부가 30일(현지시간) 연간 400억 파운드(약 71조5000억원) 규모의 증세 방안을 공개했다. 지난 7월 총선에서 압승해 정권을 교체한 노동당은 15년 만에 이 같은 증세 정책을 담은 예산안을 발표했다. 레이철 리브스 재무장관은 이날 의회에서 "공공 재정의 안정을 복구하고 공공 서비스를 재건하겠다"고 말했다.
기업 의료보험, 연금 보험 부담금 인상
예산안에 따르면 세금 인상은 대부분 기업과 부유층을 대상으로 이뤄진다. 내년 4월 시작되는 새 회계연도부터 기업이 부담하는 근로자의 의료보험·연금 등 국민보험(NI)의 부담금이 급여액의 13.8%에서 15%로 1.2%포인트 인상된다. 이를 통해 연 250억파운드(44조8000억원)의 세수를 추가 확보할 방침이다. 사모펀드 매니저의 거래 이익에 부과하는 세금은 28%에서 최고 32%로 높인다. 개인이 주식 등 대부분 자산을 매각할 때 내는 자본이득세(CGT)는 저율 구간의 경우 10%에서 18%로, 고율 구간은 20%에서 24%로 인상했다. 사립학교 수업료의 부가가치세와 개인 제트기 항공 여객세도 인상된다.
영국 내 부유한 외국인에게 해외 소득에 대한 면세 혜택을 주는 '외국 거주자'(Non-Dom) 과세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과세 제도를 마련할 계획이다. 이를 통한 세수는 향후 5년간 127억 파운드(22조8000억원)로 추산했다.
현재 상속세 과세 대상이 아닌 상속 연금을 2027년부터 과세 대상에 포함하고 농장에 대한 상속세 감면 혜택 축소 등 상속세 조정으로 연 20억파운드(3조6000억원) 추가 세수를 확보할 계획이다. 싱크탱크 재정연구소(IFS)에 따르면 400억 파운드의 증세 규모는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1.25%에 달한다. 이같은 규모의 증세는 1993년 보수당 정부의 노먼 러몬트 전 내무장관 이후로 30여년 만에 가장 큰 폭이다.
심각한 재정 부실
영국 정부가 대대적인 증세를 선택한 것은 누적된 재정 적자로 인해 지속가능성이 위태로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보수당 리스 트러스 전 총리는 세수 부족에 대한 대안이 없이 감세 정책을 내놓자마자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하고, 국채 이자가 오르는 등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트러스 총리는 취임 후 불과 44일만에 사임했다. 리브스 재무장관은 앞서 "전임 보수당 정부로부터 공공 재정 '블랙홀'과 악화한 공공 서비스를 물려받았다"고 거듭 주장했다. 리브스 장관은 이날 BBC방송에서 "(이번 증세는) 반복하고 싶은 예산이 아니다"라며 "하지만 이번 예산은 과거를 깨끗이 지우고 영국의 공공 재정을 확고한 궤도에 올려놓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증세로 인한 침체 우려를 의식한 리브스 장관은 "경제 성장을 이끌 유일한 길은 투자, 투자, 투자"라며 세수와 차입을 공공 투자에 쓰겠다고 강조했다. 공약에 따라 최근 신설한 국부펀드(National Wealth Fund)를 통해 700억 파운드(125조1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촉진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예산의 상당 부분은 복지와 국방 등에 쓰인다. 국민보건서비스(NHS)를 비롯한 국가 보건 서비스에 대한 지출은 226억 파운드(40조5000억원) 늘어난다. 국방 예산은 30억 파운드(5조4000억원) 증액됐는데, 이는 주로 임금 인상에 사용될 예정이다.
국가 최저 임금은 내년부터 시간당 12.21파운드(2만1901원)로 6.7% 높아진다. 예산책임청(OBR)은 이번 예산안을 바탕으로 산출한 영국의 실질GDP 증가율을 올해 1.1%, 내년 2.0%, 2026년 1.8%로 전망했다. 평균 물가상승률은 올해 2.5%, 내년 2.6%, 2026년 2.3%로 예측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