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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프리즘] SK하이닉스와 헝그리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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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기업인을 만날 때마다 듣는 단어가 있다. ‘위기’다. 업종도 다르고 규모도 제각각인데, 다들 이 얘기만 한다. 우리 기업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턱 막힌단다. 힌트라도 얻을 요량으로 위기를 딛고 일어선 해외 사례를 뒤지지만, 기업 환경이 워낙 다르다 보니 그저 참고용에 그친다.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멀리서 찾을 필요 없다. SK하이닉스가 있지 않냐”는 말이 돌아왔다. “한때 파산 위기에 몰렸던 골칫덩이가 ‘넘사벽’ 삼성 반도체보다 영업이익을 더 낸다니, 이렇게 드라마틱한 부활 사례가 세상 어디에 또 있느냐”면서.

SK하이닉스는 지난 3분기에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영업이익 추정치 4조5000억원)을 압도하는 7조3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한국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기업’이 됐지만, 25년 전 모습은 사뭇 달랐다. 김대중 정부의 빅딜 정책에 따라 1999년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출범한 하이닉스는 태어날 때부터 천덕꾸러기였다. 반도체 기업 특성상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돈을 투자해야 하는데, D램 가격 하락 여파로 탄생 직후부터 조(兆) 단위 적자를 냈기 때문이다. 하이닉스 이름 앞에는 ‘부실기업’ ‘동전주’(2003년 주가 125원)란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녔다. 유동성 위기에 몰린 하이닉스는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채권단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2만2000여 명이던 직원을 절반으로 줄이고, 급여는 5년 연속 동결했다. 반도체 하나만 남기고 휴대폰·LCD·전장·모니터 사업부를 다 떨어냈다.

투자는 뒷전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실적(매출 5조2887억원·영업적자 1조9102억원)을 낸 2001년엔 더 그랬다. 그냥 주저앉아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이닉스 임직원은 달랐다. 돈을 적게 들이고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백방으로 뛰었다. ‘헝그리 정신’을 발휘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도체 회사의 실력은 누가 더 세밀하게 회로를 그리느냐로 판가름 난다. 삼성은 당시 첨단 노광장비인 스캐너를 활용해 0.13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 공정에 들어간 상태. 스캐너 살 돈이 없어 0.18㎛에 머물렀던 하이닉스는 기존 장비인 스탬퍼를 개선하는 방식으로 돌파했다. 모두 기적이라고 한 ‘블루칩 프로젝트’의 성공은 하이닉스에 엄청난 비용 절감과 함께 자신감을 안겨줬다. 하이닉스가 3년 뒤 ‘300㎜ 웨이퍼 공장을 새로 짓는 대신 기존 200㎜ 라인을 리모델링해보자’(T1 프로젝트)며 누구도 해보지 않은 도전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때 얻은 자신감과 절박함이 있었다. 그 힘으로 하이닉스는 2005년 워크아웃을 조기 종료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 SK하이닉스를 먹여 살리는 HBM(고대역폭메모리)도 헝그리 정신이 만든 결과물이다. 2010년 엔비디아와 AMD가 삼성과 하이닉스에 고용량 D램 개발을 요청했을 때나 2019년 HBM의 시장성이 의심받았을 때, 삼성은 주저했지만 하이닉스는 밀어붙였다. 살림이 넉넉했던 삼성은 ‘불확실한 미래’에 힘을 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이닉스는 1등을 넘어서려면 모험은 불가피하다며 도전을 택했다.

삼성과 하이닉스가 그때 느낀 ‘절박함’의 정도가 지금 반도체 시장의 판도를 갈랐다.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래가 불투명한 ‘제2의 HBM’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럿 있기 때문이다. 하이닉스가 성공에 취해 자만에 빠지는 순간, 절치부심한 삼성이 일본 반도체 기업들과 싸웠을 때의 헝그리 정신을 다시 장착하는 순간, 판도는 언제든 뒤바뀔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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