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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의 시선] 노동의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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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 데뷔한 지 30주년이다. 시인 등단은 그 4년 전에 했으니 문인으로서는 34주년이다. 어느 서점 측에서 행사를 기획하며 그런 말을 하길래,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싶었다. ‘온종일 개미처럼 일하는데도 뭐 하나 성장한 것 없이 또 밤이구나.’ 이런 자괴감이 매일이다.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문학이고 그런 문학보다 더 어려운 게 먹고살려고 하는 문학이다. 다만, 한 가지 일을 꾸준히, 열심히 해왔다는 것만이 조용한 자부심이다.

공사판 막노동을 많이 해봐서 하는 말인데, 글쓰기는 정신노동이 절대 아니다. 육체노동이다. 원고를 마치고 누우면 온몸이 부서지고 어질어질 천장이 무너져내린다. 예술가인 척하는 관종들이 넘쳐나지만, 예술가가 되고 싶으면 장인(匠人)이 먼저 돼야 한다. 예술가는 노동자이고, 노동자가 아닌 예술가는 사기꾼이다.

미국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중 전선에서 낙오, 독일군의 포로가 돼 드레스덴 지하 고기저장고에 감금됐는데, 연합군이 사흘 밤낮 ‘원폭만큼의’ 소이탄들을 쏟아부어 도시 전체를 용광로로 만들어버렸다. 불길이 사그라든 뒤 지상으로 기어 올라온 보니것은 젤리처럼 녹아 눌러붙어버린 인간과 문명을 보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소설가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아무리 무거운 비극을 다룬들 낄낄거리며 읽게 되는 소설과 산문을 썼다.

2007년 4월 11일 여든다섯의 나이로 죽은 그의 유고집 <아마겟돈을 회상하며>의 서문은 그의 아들이자 작가인 마크 보니것이 썼는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일주일이나 걸려서 쓴 글의 원고료가 50달러라고 불평했을 때, 아버지는 내가 글을 쓸 수 있다고 알리는 두 페이지짜리 광고를 내려면 돈이 얼마나 들지 참작해봐야 한다고 하셨다.” 커트 보니것다운 ‘유머(humor)’이긴 해도 여기에는 진정성 있는 일침이 숨어 있다.

문맹적(文盲的)인 오해가 있을까 봐 전제하자면, 당연히 노동자는 합리적 임금과 처우를 받아야 하며 노조와 노동운동은 보장돼야 한다. 내가 자유주의자 중에서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동의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자, 심지어 가난한 경제적 자유주의자이긴 해도, 언젠가는 한국도 영국처럼 사회민주당(노동당)이 집권하는 날이 있을 수 있겠고, “그러면 그런 거지 뭐.”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현실은 경제적 진실과는 상관없이 굴러가기 때문이다. 그게 사람들이고 세상만사다. 처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영국 국민들은 노동당을 선택했던 것처럼. 어쨌거나 그건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영국의 자유당, 노동당과 같은 야당세력은 보수당과 단결해 독일을 포함한 반(反)자유 반인권 전체주의 외적(enemy)들과 목숨을 바쳐 싸웠기 때문이다. 솔직히 사민당이 집권하면 내 처지 같아서는 당장 이득이 많지만, ‘착한 말들로 포장된 지옥으로 가는 길’들이 싫을 따름이다.

사회주의적 정책과 체제는 평등과 정의는커녕 ‘위선 비리 특권계급(노멘클라투라)’과 ‘파멸적 관료주의’ 등이 반드시 창궐한다. 나는 그런 것들이 내 ‘부자가 아님’보다 더 싫다. 지난 34년간 내 노동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내가 나로서’ 세월을 견디고 세상을 공부하게 해준 것이다. 노동을 사회와 나의 관계로만 인식하는 것은 패착(敗着)이다. 내 노동과 나 자신의 관계가 성실하지 못하면 돈벌이 이전에 그 인생은 병들게 돼 있다. 도덕도 ‘직업도덕’이 없다면 도둑이다.

전체 노동자들의 한 줌도 안 되는 ‘귀족세습 정치노조’의 가장 큰 과오는 노동운동을 독점한 채 정작 진짜 약자인 노동자들은 이용하고 외면하는 것에 있지 않다. 노동자들을 노동에 대한 진실과 진정성으로부터 소외당하게 만들고 있다는 데에 있다. 자본과 생산수단 때문이 아닌 이런 ‘노동소외’라니. 마르크스가 무덤 속에서 통곡할 일이 아닌가. ‘노동의 타락’은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을 파괴한다. 불지옥에서 살아돌아온 소설가는 아들에게 너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지 말기를 당부한다. 그 자유를 뺏기면, 빛과 어둠이 어우러지는 삶의 기쁨을 어둠으로만 보는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절망 속에서 그 소설가를 구원한 것은 그의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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