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PEF)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제왕’으로 불린다. 블랙스톤, KKR 등이 거대 기업을 잇달아 먹어 삼키자 2004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붙인 수식어다. 돈이 말을 하는 새 금융자본주의 시대가 만개했다는 의미가 담겼다.
2004년은 한국에서 PEF가 출범한 해이기도 하다.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에 근거 조항이 마련되고 그해 12월 1호 PEF가 등장했다. 당시 재정경제부 이헌재 장관, 김석동 금융정책국장의 특명을 받고 도입 실무를 총괄한 주역이 최상목 경제부총리(증권제도과장)다.
그로부터 20년, 사모펀드는 한국에서도 제왕 자리를 넘본다. 136조원의 거대 자본으로 작년 국내 인수합병(M&A)의 37%를 휩쓸었다. ‘사모펀드 종주국’ 미국과 동일한 점유율이다.
그래서 토종 PEF 제도가 성공적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글쎄요’다. 기업구조조정 활성화, 신성장 산업 지원 강화라는 핵심 목표와의 괴리가 적잖다. MBK파트너스발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잘 보여준다. MBK는 ‘경영진 교체=기업가치 제고’라고 주장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기존 경영진에 문제가 적잖은 건 맞다. 하지만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기업’ 신화의 주역이다. 주주 친화 경영에서도 나름 성과를 냈다. 배당 성향이 70~80%에 달하고 밸류에이션도 높다.
반면 MBK가 미는 새 경영진의 능력은 미검증이다. 숱한 실패 딜에서 보듯 MBK의 자체 경영 능력도 썩 미덥지 못하다. 누가 이겨도 ‘승자의 저주’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결국 펀드 이익에 집착해 최고의 제련회사를 불투명한 미래로 몰아간다는 의구심이 불가피하다.
공격펀드에 중국 돈이 유입되며 ‘인수 후 중국 매각설’이 부각되자 MBK는 단호히 부정했다. 하지만 펀드가입자 수익을 최우선하는 사모펀드 속성과 반복되는 이상 행보를 볼 때 장담은 무리다. MBK는 불과 10개월 전에도 한국앤컴퍼니 경영권 교체 시도로 구설에 올랐다. 형제간 경영권 다툼에서 한쪽 편을 든 것 외 다른 명분은 희박했다.
‘닥치고 쩐의 전쟁’으로 몰아가는 사모펀드 행태는 2년 전 막내린 한진칼 사태 이후 두드러진다. 당시 ‘강성부(KCGI)펀드’는 지분 9% 매입 후 남매간 분쟁이 격화돼 주가가 두 배가량 급등하자 투자금을 전격 회수했다. 다수의 시장 참여자가 조원태 회장 체제를 지지했음에도 반기업 정서를 활용해 박빙 승부를 펼쳤다. 투기적·기회주의적 주주들을 소액투자자라는 이름으로 엮어내는 여론전에도 능수능란했다.
어느덧 사모펀드는 사회·경제적 비용 증가 기제로도 작동 중이다. 원아시아파트너스 대표는 하이브의 SM엔터테인먼트 공개매수에 맞서 시세를 조종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관행을 웃도는 큰 성과 보상을 챙긴 민희진 어도어(뉴진스 소속사) 대표도 사모펀드를 매개로 경영권 확보를 모색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두 사건으로 K팝과 K팝 선두 주자 하이브의 위상이 크게 훼손됐다.
사모펀드발 연쇄 상장폐지 움직임도 논쟁적이다. 작년 오스템임플란트, 루트로닉에 이어 올해는 쌍용C&C, 락앤락 등 5개사가 ‘공개매수 후 상폐’ 수순을 밟고 있다. 상폐 후 자산 매각·감자 같은 투자금 조기 회수로 내달릴 경우 관련 산업 타격이 불가피하다.
가장 걱정스런 대목은 3류 정치와의 공생이다. 민정수석 임명 직후 사모펀드를 세워 불법 투자한 조국 일가 비리가 대표적이다. 라임·옵티머스 사태 때도 검은 유착이 목격됐다. 이외에도 관련 정황은 숱하다. KCGI와 키스톤PE는 ‘문재인 정부 특혜기업’ 에디슨모터스의 황당한 쌍용차 인수전에 가세했다. HYK파트너스도 한진그룹 경영권 분쟁 당시 한진 2대주주에 오른 뒤 ‘이재명 지키기 범국민대책본부’ 발기인을 사외이사로 추천했다. 이러니 금투세는 사모펀드 감세용이라는 주장이 먹힌다.
사모펀드는 ‘문 앞의 야만인’으로도 불린다. 틈만 보이면 남의 집 현관을 부수고 난입하는 강도 같은 행태에 빗댄 표현이다. 사모펀드가 경제 내 비효율 제거에 기여한 사례도 적잖다. 하지만 만기 3~5년짜리 펀드와 장기·지속 성장을 추구하는 기업은 본질적으로 모순적 존재다. 늘 선진 지배 구조를 외치지만 사모펀드야말로 당국의 추적·감시망에서 비켜나 있는 그림자 금융에 가깝다. 태생적·구조적 한계를 보완하는 K사모금융 제도 재설계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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