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심을 교체하며 종이 위에 글씨를 쓰는 필기 도구를 흔히 ‘샤프’라 한다. 1882년 영국의 호킨즈와 모턴이 회전식 샤프를 만들었고 1913년 미국의 키란은 이를 상용화하면서 끝이 늘 날카롭다는 의미로 ‘에버 샤프’라 명명했다. 하지만 2년 후 일본의 발명가 하야카야 도쿠지는 연필의 끝 부분을 누르면 연필심이 내려오는 방식을 고안했다. 기계식 연필로 불렸던 하야카와의 샤프 펜슬은 일본 뿐 아니라 미국 등 글로벌에서 인기를 얻었고 샤프는 연필의 대명사로 인식됐다. 덕분에 하야카와는 모든 제품에 ‘샤프’라는 브랜드를 입혔다.
그러나 1923년 대지진으로 공장이 파괴되자 하야카와는 라디오 제조로 업종을 전환했다. 회사명은 하야카와 금속공장으로 바꾸었지만 제품 브랜드는 샤프를 고집했다. 이를 기반으로 1953년 내놓은 최초의 TV 수상기 또한 ‘샤프 TV’로 불렸다. 이후 샤프는 전자레인지, LCD TV, 스피커, 앰프, 카세트 플레이어, 휴대전화 등을 만들며 일본의 명실상부한 대형 전자기업으로 변신했다.
승승장구했던 샤프가 어려움을 겪은 건 2012년이다. TV 등이 한국에 밀리며 그해 6조원이 넘는 연간 손실을 냈다. 그러자 대만의 전자제품 위탁 제조기업 폭스콘이 구원투수를 자처하며 샤프를 인수했다. 그리고 중장기 계획으로 샤프와 폭스콘의 전기차 개발 계획을 세웠다. 폭스콘이 개발한 전기차 전용 ‘모빌리티 인 하모니(MIH) 플랫폼’을 샤프가 활용해 전기차 시장에 진출하는 방안이다. 제조는 폭스콘, 개발 및 판매는 샤프가 맡는 식이다.
최근 컨셉트도 공개했다. ‘LDK플러스’로 명명된 전기 미니밴이다. 샤프는 해당 제품에 대해 차가 달릴 때보다 정지해 있을 때를 염두에 두었다고 강조한다. 이른바 ‘확장된 거실’ 컨셉트다. 실제 뒷좌석은 응접실처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할 수 있고, 문이 닫히면 양쪽 창문의 액정 셔터가 닫혀 프라이빗 공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인공지능(AI)이 일상생활 속 가전제품에서 학습한 정보를 바탕으로 사용자 취향에 맞게 에어컨과 밝기를 자동으로 조절해 편안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후면에는 65V 디스플레이가 장착돼 몰입형 극장이나 어린이 놀이 공간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혼자 업무에 집중해도 된다.
샤프가 주목하는 것은 비슷한 방식으로 전기차 사업에 진출한 소니와 혼다의 행보다. 2025년 소니혼다모빌리티가 내놓을 어필라 전기차의 소비자 반응이 좋으면 기대감을 갖겠지만 반대라면 양산을 주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폭스콘의 생각이다. 애플 휴대전화 등을 생산하는 폭스콘의 고민은 제조업의 지속이다. 이를 위해선 공장에서 생산 가능한 제품의 종류 또는 물량이 지속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폭스콘이 새로운 제조물로 전기차를 주목하는 배경이다. 샤프는 전자 제품의 대표 브랜드를 전기차에 입히고 폭스콘은 제조를 맡는다.
이런 흐름은 국내 전자기업에 은근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오랜 시간 전자제품 경쟁사로 활약했던 일본 기업들이 전기차 시장에 속속 뛰어들고 빠른 추격자를 자처한 중국 전자 기업도 앞다퉈 전기차 시장에 진출하는 만큼 한국 기업 또한 전기차 참여 가능성을 높이고 있어서다. 대표적으로 LG전자와 삼성전자 등의 전기차 부문을 주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간 국내 전자기업은 완성차 기업에 다양한 부품을 공급하며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지켜왔지만 글로벌 흐름에서 전자기업의 고객은 성격이 달라지는 중이다. 전기차를 점차 전자제품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어서다. 이 경우 전기차는 당연히 전자 기업의 사업 확산에 지나지 않는다. 소니와 샤프가 전기차에 뛰어든 배경도 결국 전자 제품을 연장하는 차원이다. 그러자 이제는 전기차를 위탁 생산해주려는 자동차기업도 생겨나고 있다. 이들 또한 본질은 제조업이기 때문이다.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나 같은 제조물임을 고려할 때 제조물이 없어 공장 문을 닫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는 경쟁이다.
권용주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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