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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탄생 120년…‘광야’와 ‘절정’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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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曠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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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는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시 ‘광야(曠野)’입니다. 교과서에도 나와서 아주 친숙한데, 이 시는 그가 죽고 난 뒤에 빛을 본 유고 작품입니다. 육사의 동생(이원조)이 광복된 지 4개월 후인 1945년 12월 17일 자유신문에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지요.

특이한 것은 제목 ‘광야’에 쓰인 한자가 ‘빌 광(曠)’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을 의미합니다. 보통은 ‘넓을 광(廣)’을 쓸 것 같은데, 특별히 ‘빌 광’을 쓴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시에 나오는 들이 만주 벌판처럼 넓은 곳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일제에 빼앗겼던 고향의 들판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같은 단어라도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지요. 물론 두 한자 모두 넓은 들을 두루 뜻하기 때문에 애써 구별할 것까지는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육사는 나라 없는 세상에서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하며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빛낸 시인입니다. 문학사적으로도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만 39년의 짧은 생애에 옥살이만 17번이나 하고 최후마저 감옥에서 맞았으니 기구하기 짝이 없는 삶이었지요.

그가 태어난 곳은 경북 안동입니다. 어릴 때 한학을 배운 뒤 보문의숙에서 공부했고, 1924년 일본 도쿄의 긴조예비학교 1년 중퇴 후 1925년 중국 베이징의 중국대학 상과에서 2년간 공부하다 중퇴했습니다. 이 무렵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지요.

1927년 귀국 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때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습니다. 출옥 후 중외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1930년 1월 3일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했지요. 이 무렵에 훗날 교보생명을 창업하는 신용호에게 영향을 미쳐 독립운동자금 지원과 교육보험회사 설립을 꿈꾸도록 했다고 합니다.

1932년에는 중국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수학했고 이듬해 귀국해 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활발히 발표했습니다. 1943년 다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온 뒤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됐고 이듬해 광복을 1년 5개월 앞두고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습니다.

올해는 그의 탄생 120주년과 순국 80주년입니다. 마침 교보문고가 대산문화재단과 함께 <이육사 탄생 120주년 기념 시그림전 ‘절정, 시인 이육사’>(9월 5~29일)를 준비했군요. 전시에는 김선두, 노충현, 박영근, 윤영혜, 윤종구, 이동환, 이재훈, 진민욱 등 8인의 화가가 참가해 이육사의 대표 시 ‘광야’ ‘절정’ ‘청포도’ ‘꽃’ 등 20편을 개성 넘치는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대산문화재단의 신창재 이사장은 개막식에서 “대산문화재단과 교보생명의 창립자인 대산 신용호 선생은 일찍이 이육사 시인을 만나 ‘큰 사업가가 되어 헐벗은 동포들을 구제하는 민족자본가가 되길 바란다’는 말씀을 듣고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고, 이를 계기로 민족을 위한 큰 뜻을 품게 됐다고 한다”며 “그 뜻은 교보문고와 대산문화재단의 창립으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 문화 발전에 일조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개막식에는 이육사 시인의 외동딸인 이옥비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이 참석해 전시를 감상하고 소회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시그림전의 도록 <절정, 시인 이육사>도 발간됐습니다. 전시작 24점의 이미지와 함께 이육사의 시 세계를 다룬 홍용희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실려 있군요.

전시회와 도록의 표제작인 ‘절정’도 함께 감상해 보겠습니다.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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