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심장은 독일이고 독일의 엔진은 자동차산업이다. 독일 자동차산업의 위기는 저물어가는 ‘유럽의 시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미국, 한국, 중국, 일본 자동차 회사들이 새로운 시대에 맞게 진화하는 동안 독일은 자신이 머물던 자리를 지키려다 어려움에 처했다.
상징적 사건은 유럽 최대 자동차 기업 폭스바겐의 독일 공장 폐쇄다. 폭스바겐이 본거지에서 공장 문을 닫는 건 1937년 창사 이래 처음이다. 경영진은 또 30년째 유지해온 고용안정협약도 종료하겠다며 구조조정을 예고했다. 이 경우 일자리 2만 개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폭스바겐은 “극도로 긴박하며 위험한 지경”이라고 표현했다.
고강도 규제와 높은 임금으로 인해 생산성은 떨어지고 미국과 중국 등 경쟁자들에게 혁신과 가격경쟁력에서 밀리며 안방까지 내줄 위기에 처한 것이다. 폭스바겐은 중국 내 공장 한곳의 폐쇄를 계획 중이며 추가 폐쇄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유럽연합(EU)은 2035년부터 유럽에서 내연차 판매를 금지하기로 작년 2월 협약했다.
친환경을 위한 이상적인 대책이지만 폭스바겐이나 메르세데스벤츠, BMW 등 100년 이상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선도해 온 유럽 기업들을 옥죄었다. 이들도 급하게 전기차 전환에 나섰지만 내연기관차만큼 경쟁력이 쉽게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글로벌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이 닥치자 손실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중국 기업들이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빠르게 성장하면서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유럽 자동차 수요가 급감했다. BMW도 지난 9월 10일 올해 영업 전망치를 낮췄다. 이날 프랑크푸르트 증시에서 BMW 주가는 11.15% 급락했다.
유럽 배터리를 대표하는 스웨덴 기업 노스볼트 역시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일부 공장을 폐쇄·매각·통합하고 직원 규모도 대폭 줄이겠다는 계획이다. 2016년 스웨덴에서 설립된 노스볼트는 전기차용 배터리를 생산한 최초의 유럽 기업이다. 유럽 배터리회사 가운데 유일하게 유럽 내 기가팩토리를 운영 중이며 한국과 중국 기업들과 경쟁해 유럽 내 배터리 자급화를 이룰 수 있는 주체로 거론돼왔다. 기업가치는 120억~150억 달러(약 16조~20조원)로 추정된다.
2008년 미국과 비슷했던 GDP, 지금은 1.7배 벌어져
자동차와 배터리산업만 문제가 아니다. 유럽이 경쟁력을 잃고 쇠퇴하고 있다는 지적은 몇 년째 이어졌다.
지난해 7월 유럽국제정치경제센터(ECIPE)는 ‘유럽연합(EU)이 미국의 한 주였다면’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계속 부유해질 때 유럽은 계속 가난해졌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유럽 경제가 전체적으로 쇠퇴하고 있으며 2000년 프랑스, 독일의 GDP를 미국의 50개 주별 GDP 순위와 비교했을 때 각각 36번째, 31번째 주와 비슷했는데 현재는 48번째, 38번째 주와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2008년 미국과 유럽의 경제 규모는 거의 비슷했지만 2024년 미국과 유럽의 총 GDP 격차는 1.7배로 거의 두 배에 가깝다. 생산, 소비, 투자 모두 성장이 둔화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유럽의 평균 임금은 미국보다 37% 낮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유럽의 위상은 달랐다. 세계 100대 기업 중 41곳이 유럽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한때 노키아(휴대폰)와 네슬레(식품), BP(석유)가 세계 시가총액 톱10에 자리했지만 지금은 세계 20위권에 덴마크 제약 기업 노보노디스크 한 곳 정도가 간신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유럽 대기업, 미국보다 연간 400조 적게 투자
EU는 경제 정체를 타개할 강력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EU가 찾은 구원투수는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다. 2010년 초반 유럽 재정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섰던 그는 300장이 넘는 보고서를 들고 또 한 번 유럽을 구하러 왔다.
지난 9일 드라기 전 총재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 발표 자리에서 유럽이 미국과 중국 등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는 이유는 혁신의 부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유럽이 ‘중등 기술의 함정(middle technology trap)’에 빠졌다고 우려했다. 연구개발(R&D) 지출 측면에서 유럽 기업은 변함없이 자동차 생산업체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미국은 20년 동안 소프트웨어와 다양한 정보기술(IT)로 대체됐다. 이 와중에 유럽이 자랑하던 자동차산업은 전기차와 자율주행이라는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경쟁력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세계 50대 기술 기업 중 유럽 기업은 네덜란드 반도체장비 제조사 ASML, 아일랜드 IT 컨설팅사 액센츄어, 독일 소프트웨어사 SAP, 프랑스 슈나이더일렉트릭 등 4곳뿐이다. 2013~2023년 유럽의 세계 기술수익 점유율은 22%에서 18%로 감소한 반면 같은 시기 미국의 기술수익 비중은 30%에서 38%로 증가했다.
기술의 격차는 기업의 격차를 벌렸다. 지난 50년간 유럽에서 1000억 유로(약 147조원) 이상의 시장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받는 유니콘 기업은 단 한 곳도 탄생하지 않았다. 반면 미국에서는 1조 유로(약 1475조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기업이 6개나 탄생했다.
장황한 규제와 경직된 노동시장이 유럽의 경제 활력을 떨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블룸버그통신은 규제주의가 에너지 비용을 높이고 미국 기업과의 시가총액 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에너지기업인 토탈에너지의 파트리크 푸야네 최고경영자(CEO)는 “EU의 지나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기준이 미국 최대 에너지기업 엑손모빌과 유럽 에너지 기업들의 시가총액 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다”고 블룸버그에 말했다.
ESG 규제가 경쟁력과 시총 측면에서 유럽 기업을 미국 기업보다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다. 메르세데스벤츠, 유니레버 등도 최근 당국의 과도한 환경 규제에 반발하고 있다. 유럽 산업체 회의는 최근 “엄격한 규제가 경쟁력 상실을 가속화하고 있다”며 “회원사들의 사업 전망은 유럽 외부에서 더 나아질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혁신에 대한 투자가 뒤처진 것도 문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지난 4월 ‘야망을 잊은 대륙 유럽’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유럽 국가들이 고령화와 장기 저성장에 시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맥킨지 글로벌에 따르면 유럽 대기업은 2022년 미국 기업보다 60%(약 400조원) 적게 투자했고 3분의 2 속도로 성장했다.
생산성은 주요 국가보다 낮은 반면 에너지 가격은 훨씬 높았다. 혁신은 부재하고 에너지와 임금에 투입해야 하는 비용이 높아 투자까지 이뤄지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진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유럽 창업가들조차 미국 벤처캐피털 투자자들에게 자금을 조달하고 미국에 법인을 세워 미국 증시에 상장하는 것을 선호한다. 2008~2021년 사이에 유럽에서 설립된 유니콘 스타트업의 약 30%는 본사를 해외로 이전했고 그중 대부분은 미국으로 본사를 옮겼다.
또한 유럽 100대 기업의 기업가치는 2000년 4.6조 달러에서 현재 8.9조 달러로 증가하는 데 그친 반면 미국은 7.4조 달러에서 무려 26조 달러로 급증했다. 프랑스의 명품, 독일의 자동차, 스웨덴의 가구, 스위스 제약 등 100년 넘은 기업들이 여전히 건재하지만 구글이나 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애플처럼 혁신을 주도할 성장산업의 경쟁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때문에 드라기 전 총재는 유럽이 혁신에 나서지 않으면 복지, 환경, 자유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시점에 도달한다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이를 위해 EU가 연간 7500억~8000억 유로를 투자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EU GDP의 4.4~4.7%에 맞먹는 규모다.
드라기 전 총재는 “민간 부문은 공공 부문의 지원 없이는 이런 규모의 투자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며 “혁신 등을 통해 유럽 핵심 공공재에 대한 공동 재원 마련이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